버스터 키튼의 영화를 볼 때 처음으로 느끼는 것은 수다스러움이다. 그리고 뒤이어 느껴지는 것은 짠하다는 감정이다. 키튼의 수다스러움은 단절된 마디 없이 사슬처럼 이어진 이야기에 있다. 키튼은 하나의 결론을 향해서 말도 안 되리 만치 놀라운 몸동작으로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마치 봉제공장의 재봉틀처럼 쉼 없이 말을 건네는 듯하다. 그래서 짠하다. 그런데 키튼의 영화 〈카메라맨〉에는 인상적인 단절의 순간이 한번 등장한다. 위험을 무릅쓰고 사랑하는 여성을 구해낸 키튼은 쓰러진 그를 살리고자 약국으로 달려간다. 아주 잠깐의 시간이 지나 약을 한 아름 품고 나온 버스터의 눈에 비친 장면은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사고 현장을 떠나는 셀리의 뒷모습이다. 자신의 사랑과 선의는 전달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남자에게 그 빼앗겨버리고만 상태다. 기력을 잃은 버스터는 그대로 모래밭에 주저앉는다. (more…)
우리 사이에 굳이 감상 글이 필요 있을까!
기륭전자에 잠시 다녀왔다.
뒤늦게 도착한 집회에는 대략 백여 명에 조금 못 미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나마 많이 온 것이라 한다. 게다가 대다수가 진보신당 사람들이다. 촛불에 대한 관심과는 전혀 다르게 여전히 ‘비정규직’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다고 해도 무방하겠다.
현재 비정규직은 대략 850만 명 선에 이른다. 전체 노동자의 54%가량이다. 그런데 공식적으로 추출된 이 수치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한국 노동자의 90% 정도는 중소기업에서 일한다. 서너 군데의 중소기업에서 수년간 정규·비정규직으로 일한 경험을 떠올리자면, 중소기업에서의 정규·비정규직은 별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를 사업장이 태반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한국 노동자의 90여%는 잠정적 비정규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아니 이 정도 수치라면 ‘비정규직’이란 용어 자체에 별 의미가 없다. 언제, 어떻게 정리될지 모르는 이들에게 사회적 신뢰를 기대하긴 어렵다. 신뢰가 상실된 사회에서의 생존은 투쟁이다. 싸워서 이기는 놈만 살아남는다. 삶이 팍팍하다는 말과 같다.
점차 팍팍해지는 사회에서는 나의 처지만이 가장 중요해진다. 지금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불확실한 미래를 버텨낼 여력이 생긴다. 계층 간에 동질감이 생겨 이해관계에 따라 산발적인 시민운동은 벌어지겠지만 계급에 대한 이해는 점차 사라질 것이다. 보다 바람직한 제도를 직조할 정당마저 사라질 것이다.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관심은 더욱 나은 삶에 대한 관심과도 상통하지만 나의 이해만을 따지는 사회로 진행될 것이다. 그런 사회는 불행한 사회다.
직장 핑계로 미적거리지 말고 조만간에 시간 내서 참여해야겠다.
영삼이 말처럼 굶으면 죽기야 하겠지만 하루 굶는다고 죽는 것도, 꼴이 망가지는 것도 아니다.
대신 올림픽처럼 국가의 이해, 자본의 이해, 권력의 요구에 따라 이리저리 떼 지어 다니는 꼴사나운 동원보다 인민의 자발적 의지만으로도 뭉칠 수 있다는 정말로 건강한 체험을 경험하게 해 줄 것이다.
체험 삶의 현장은 티비에 없다. 대신 우리 주변에 늘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