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스스로 초래한 미성년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 이것이 칸트가 규정한 계몽이다.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델피 신전에 새겨져 있었다는 저 유명한 문구 ‘너 자신을 알라’로부터 비롯할 것이다. 즉 그 스스로 생각하고 행위 하여 책임지는 것에 이르려면 적극적인 반성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나 사회적 재앙 대다수가 파편화된 개인에게만 책임지게 하는 이 사회에서는 더더구나 어렵다.
박동훈 감독은 자신의 단편 《전쟁영화》의 주제를 좀 더 확장하여 《계몽영화》라는 장편으로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는 이 영화를 만든 이유로 “태도”를 꼽았다. 《전쟁영화》가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굳어진 태도를 다룬다면, 《계몽영화》는 1931년을 시작으로 대물림된 태도를 다룬다. 태도는 주어진 대상을 대하는 자세를 말한다. 그러므로 감독의 의도는 명확해 보인다. 영화를 보는 관객 스스로 생각할 것은 요청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어려운 요청이다. (more…)
Film.
래리 코헨 감독의 영화 ‘그것은 살아있다’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검은 화면은 흰 점으로 뒤덮인다. 그것들은 배양된 세균 같기도 하고 또 때로는 우리 몸을 끝없이 파먹고 짓무르게 하는 벌레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음악과 함께 등장한 이 흰색 덩어리는 어쩌면 암세포일지도 모른다는 암시 또한 풍기지만, 이내 그것은 플래시 불빛과 뒤섞이고 만다. 그러나 영화의 말미에서 알 수 있듯 이는 하수구를 휩쓰는 경찰들을 플래시 불빛이다. (more…)
1980년대 중 후반, 친구들 사이에 회자되던 두 편의 비짜 영화가 있었다. ‘악마의 창자’와 ‘재생자’가 그 두 편이다. 동아대 혹은 부산대 비디오방에서 이 영화들을 보고 온 이들은 종종 영화의 내용을 헷갈리기 일쑤였다. 한 친구가 말했다. ‘연필로 배를 찌르고 휘휘 돌려. 그럼 창자가 쏟아져 나와 목을 막 조르는 기라’, 정확한 내용은 연필로 발뒤꿈치 바로 위를 치르는 것으로 ‘악마의 창자’ 초반 내용이고, 뒤의 내용은 ‘재생자’의 클라이맥스다. 이 영화들의 원제는 ‘Evil Dead’와 ‘Re-Animator’. 내 또래 호러영화 팬들이 황금기라 부르는 80년대 최고의 영화들이다. (more…)
6월 2일. 하늘이 어둡다. 어두운 정도가 아니라 그냥 검다. 그뿐 아니다. 천둥 또한 끊임없이 몰아친다. 혹시나 이마저 신적 계시로 받아들이는 이가 있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마저 든다. 요즘 사회가 그렇다. 많은 이들이 80년대로 돌아갔다면 혀를 찬다. 불안, 걱정, 초조. 무속에 기대려는 이들이 많을 걸 탓할 게 아니다. 앞날이 오늘처럼 깜깜하기만 한데 기댈 곳이 없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미래를 비관한다. 이는 오늘에 맞닿은 어제가 비관적이었기 때문이다. 어제는 80년대, 혹은 80년대까지다. 그리고 소수에겐 바로 어제 일이다. (more…)
한 사내가 있다. 매우 폭력적인 인물이다. 우리가 거리 곳곳에서 마주치는 널리고 널린 양아치와 같다. 그러나 그는 영화가 다루는 인물이다. 그래서 영화는 이러한 인물이 만들어진 기원을 설명한다. 그 기원에는 폭력이라는 원인이 있다. 그리고 폭력은 원치않는 살인과 사고를 낳는다. 이러한 살인과 사고는 가족의 소멸이라는 결과로 나타난다. 우연과 필연이 겹친 이 사고로 사내는 심각한 정신적 상처를 입은 채 홀로 성장한다. 이렇게 홀로 성장한 사내는 타인과 이루어지는 기본적인 소통 방식을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가장 동물적인 방식을 택한다. 바로 폭력이다.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