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월


덕배와 춘식 그리고 길남의 사진 아래 새겨지는, “1980년 7월”이라는 글을 보며 문뜩 ‘다행이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박정희와 전두환 두 명의 지독한 군사정권 사이 아주 잠깐이나마 빛이 비춰지던, 그것도 남한 땅의, 것도 절반에만 비춰지던 그 시절에 만들어진 이장호 감독의 《바람불어 좋은 날》은 정말 운 좋게도 살아남았다. 이 ‘운 좋게도’라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바람불어 좋은 날》 이후의 영화들은 상상력을 목 졸라 죽여 버리고 전두환식 3S 정책 하에 여성의 몸을 파는 것으로 이 땅에 이어졌던 ‘영화’의 숨결을 죽여 버렸으며 한국영화는 퇴보가 아니라 멸종의 위기에 처했으며 60년대의 영광은 전설이 되었다. 년 간 2억 명에 이르던 한국영화의 관객들이 단지 할리웃의 돈 덩어리 영화에 온 정신을 빼앗겼다면 그건 오만이며 피를 쏟는 마스터베이션이다. 비록 할리웃의 영화문법을 빌려왔을지언정 한국영화의 만듦새는 그 어느 곳과도 달랐으며 잔혹한 정권 아래에서도 어쨌든 끈질기게 이어져 왔다. 일종의 ‘에너지’라고 말할 수도 있을 그것을, 지금의 한국영화 감독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거의 발견할 수가 없다. 계산된 조명과 잘 디자인 된 세트와 깔끔하게 다듬어진 이야기가 영화보기의 모든 즐거움을 대변할 수는 없다. 영화를 보고난 직후 난 작년에 보았던 이만희 감독의 《암살자》와 같은 영화를 이제 한국영화에서는 더 이상 보기 힘든 게 아니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박찬욱·봉준호·임상수 등의 감독들이 만들어 내는 영화들은 매우 세련되고 훌륭하며 재미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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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에리세의 영화 《벌집의 정령El Espíritu de la Colmena, 73》은 그 뛰어난 영상들과 영화전반에 걸쳐 배어나오는 슬픈 정서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해석을 어렵게 만드는 영화이기도 하다. 굳이 프랑코 정권의 역사적 상황들을 불러올 필요조차 없이 군부독재시절의 남한영화를 떠올리기만 해도 그 상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남한의 영화들 역시도 ‘고래’와 같은 그 ‘무엇’을 에둘러 표현해나가다 결국 지쳐 나가떨어지지 않았던가. 이제 끝인 줄로만 알았던 군부독재가 다시 시작된 80년대의 남한영화들의 대부분은 그야말로 끔찍했었다. 아나의 아버지 페르난도의 선택은 결국 80년대 남한영화의 선택과도 같다.

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벌집’은 한편으로는 모호하기도 하지만, 페르난도의 말을 빌려보면 매우 노골적으로 현 사회를 ‘죽음의 휴식조차 허용되지 않는 유리 꿀벌 통 속의 벌들’로 반복해서 고백한다. 그래서 좌절과의 타협에 이은 ‘망각의 협정’은 이 영화의 전반부를 차지하는 ‘슬픈 분노’의 근원이기도 하다. 스페인 내전 기간동안 죽어간 백만여 명의 사람들과 독제정권을 통해 죽어간 2만 8천여 명의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슬픔은 결국 현실이라 불리는 것과의 타협을 통해 망각을 공유한 ‘벌집 속’ 기성세대들에 대한 비판으로 기능하며 이제 다음 세대들인 아나와 이사벨을 통해 다른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괴물’ 혹은 ‘정령’에 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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