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남자》가 지금까지 벌어들인 수익은 861억원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엄청난 돈을 보면서 과연 스ㅤㅌㅐㅍ들에게는 얼마나 돌아갈까를 생각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스크린쿼터 축소 위기 속에서 정성일 선생의 말을 빌리자면 진짜 ‘왕의 남자’ 아니 ‘왕의 노예’들에게 돌아가는 돈은, 돌아가야 할 돈은 얼마나 될까. 한국영화 부율이 5:5인 상황 속에서 대규모 스크린을 소유한 CJ와 같은 곳에서 거둬가는 돈은 861억원의 절반을 상회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정작 영화를 제작한 씨네월드는 111억 원. 이미 씨네월드 대표는 그간의 빚을 값을 수 있겠노라고 즐거워했던 적이 있고 당연히 제작자이자 감독 자신이 가져가는 돈, 그리고 왕의 친애하는 광대들이 가져가는 돈이 있고 지금까지의 충무로 관행상 인센티브는 팀 단위로 지급하는 것이 관례. 과연 이 영화에 참여한 스ㅤㅌㅐㅍ들이 이 엄청난 돈지랄 속에서 과연 중소기업 일 년 치 연봉에 해당하는 돈이라도 거머쥘 수 있을까? 여기에 부가 수익을 제하고라도 말이다. 아니면 역시 ‘관례’대로 그냥 술 한 잔 먹이고 끝낼 수도 있겠다. 실상 이재용씨 같은 이가 단 46억 원으로 몇 년 만에 수조원의 자산을 만드는 것처럼 이 사회(단지 한국만이 아니라)에서의 적정한 분배 따위는 환상에 불과하다. 자본을 소유한 자들이 모든 자본의 결정권을 가지는 것, 실제로 그 자본을 일궈낸 사람들은 소외되는 사회.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화가 존재하는가? 자본주의가 발명해낸 문화+산업은 사실 문화=산업이라는 말이다. 돈이 되는 것이면 모든 것을 팔아먹을 수 있는. 문화는 산업적 가능성이 있을 때만이 지속되고 대부분의 것들은 사라지거나 아니면 수익을 발생시킬 수 있는 쪽으로 다시 만들어진다. 만들어지는 전통.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스크린쿼터의 투쟁 속에서 진짜 주체는 늘 거기 있었음에도 언제나 가려져 버린다. 사실 스크린쿼터가 존재하거나 아니면 노정권의 바람처럼 반 토막이 나거나 간에 언제나 싸움은 노동자와 자본과의 싸움이다. 다만 스크린쿼터가 유지되었을 때 싸움의 대상이 좀더 명확해지는 반면에 스크린쿼터가 축소되었을 때는 싸움 자체가 불가능해질지도 모른다.
무려 일천억 원을 넘게 벌어들일지 모른다는 《왕의 남자》. 이 황홀한 돈지랄의 기사들 속에서 그 추악한 이권경쟁과 가혹한 노동력의 착취는 결코 눈에 띄지 않는다. 하긴 나야말로 문화라는 이름의 유령이 덧씌워져 있지 않았던가.
2006년 3월
다시 명륜동으로 돌아간다. 명륜동과 인연을 맺은 건 1998년 지구가 멸망하기 바로 전 해였다. 어쩌면 99년 지구는 포삭 내려앉았고 우리 모두는 죽음 이후의 기나긴 악몽을 꾸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종종 들고는 한다. 암튼 끔찍했던 마지막 군생활을 명륜동 꼭대기에서 보내며 마을버스 종점에 살던 형에게 기생하기 시작했던 게 서울 생활의 처음이었다. 그리고 2003년 부산을 도망쳐 처음 자리를 잡았던 곳도 명륜동 마을버스 종점 근처였다. 한국전쟁시절 사람들이 숱하게 죽어나갔다는 바로 그 장소에 짐을 풀고 근 일년간을 악몽에 시달렸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으면서 나를 말없이 내려다보던 사람들은 모두가 쓸쓸한 표정을 했던 걸로 기억된다.
단 일년을 명륜동에서 떠나있었을 뿐인데 이 년 전의 방세에 비해 거의 1.5배의 인상이 있었던 것 같다. 어느 누구와도 부딪치며 살고 싶지 않은 내게 혼자서 살 수 있는 깨끗한 방은 너무도 비싸기만 했다. 이미 주택공급은 가구수요를 넘어섰는데 집값은 떨어지기는커녕 더욱 비싸져만 간다. 이러다 급작스런 붕괴라는 참극이 발생할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반지하에 조금 지저분하기는 하지만 주변 조용하고 누구와도 마주칠 일없는 방을 어찌어찌 구해 내일이면 이사를 간다. 지난 일요일 방을 구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도 모르게 ‘외롭다’는 말이 불쑥 튀어 나왔다. 발길을 돌려 술을 사고 집으로 돌아가 영화를 틀어놓고는 혼자 낄낄거리며 술을 마셨다. 술이 맛없다는 것은 죽을 때가 됐다는 말이 있던데.
CPE(최초고용 계약법)에 항의하는 총파업 현장을 취재하던 AFP의 인상적인 인터뷰 하나.
“민주주의는 선거만으로 되지 않는다”며 “그런 생각을 하는 이가 있다면 환상에 빠진 인간”
CPE보다 더 잔인한 ‘비정규직법’이 통과되려는 이 땅은 너무도 조용하다. 어디선가 본 글에서…〈프랑스는 고용계약법에 항의하고 미국은 이민법에 항의하는데 한국은 화물연대파업 중..-.-〉이라는 글을 봤다. 같은 항의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결론을 내리는 이 어처구니없이 분리된 의식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얼마 전 영화관에서 봤던 예고편 하나. 예고편이 시작되고 단 1초 만에 떠오르는 영화가 있었다. 바로 필 조아누 감독의 《세시의 결투》. 요즘 한창 이슈가 되고 있는 《방과후 옥상》이 표절했다는 영화였고 그날 나 역시 이 영화 표절 아니냐고 물어봤을 정도였다. 단지 예고편만으로도 그만큼의 의혹을 불러일으킬 정도라면 문제 있다(그리고 한때 필 조아누 감독의 다른 영화 《헬스 키친》은 내가 가장 좋아하던 영화 중 한편이었다). 어쨌든 이 영화는 조목조목 씹히고 있는 중이고 오늘 Film2.0 사이트에 새로 올라온 기사 [신인 감독 약진 ‘눈에 띄네!’]를 읽다가 또 《방과후 옥상》과 같은 데자뷰를 불러일으킨 영화 《달콤, 살벌한 연인》. 단지 “로맨틱 코미디에 스릴러 요소를 가미해”라는 말에 떠오른 영화는 《오스틴 파워》 이전 마이크 마이어스의 걸작 《나는 도끼부인과 결혼했다》. 외로움에 몸부림치던 노총각의 옆집으로 엄청난 미녀가 이사 오고 이어지는 갑작스런 애정공세와 함께 이 여성 혹시 그 유명한 ‘도끼 살인마’가 아닐까? 하는 이야기로, 혹시나 싶어 찾아본 《달콤, 살벌한 연인》의 시높. 너무나 비슷하다. 그런데 또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런 영화가 한둘이 아니다. 가까이에 《이대로, 죽을 순 없다》가 가져온 그렉 챔피언의 영화《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도 있고 그 이전에도 꽤나 많았던 걸로 기억된다. 그리고 이런 표절의 대표작들은 매우 뛰어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들이 아니라 기존의 틀을 잘 짜여진 순발력으로 만들어진 것들인데, 어느 정도 자신 있는 연출(단편으로 실력을 인정받은 이들이다)로 자신의 상상력의 빈곤을 메우려는 시도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한국영화 수상하다.
지난주, 얼마 전부터 키튼 빠돌이로 급격히 변화해간 녀석과 술을 마시다 “만약 키튼 형님의 영화가 배드엔딩이었다면 아마 보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에 깊은 공감을 표시하며 주성치의 영화를 예로 거론했다.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 가운데 키튼과 주성치의 유사성을 공유하는 사람은 메이저 블로거였던 모군과 이 녀석과 나 이렇게 세 사람. 내가 처음 입에 올린 영화는 주성치 팬들에게 가장 천대받는 비극이었던 《홍콩레옹》이었지만 사실 처음으로 떠올린 이미지는 《서유기》의 마지막, ‘석양무사’와 ‘손오공’이었다. 쓸쓸한 해피엔딩, 만약 주성치가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창조해내지 못했을 주성치 영화의 가장 쓸쓸한 해피엔딩은 버스터 키튼의 영화들에서 보이는 해피엔딩 이후 ‘그들은 그냥 그렇게 늙어 죽어갔다.’를 담담히 묘사하는 부분과 닿아있다. 직접적으로는 《카메라맨》의 눈물겨운 장면을 떠올릴 수밖에 없겠지만. 오히려 《홍콩레옹》이라면 키튼의 《북극》쪽에 닿아있다. 그 악몽 같은 꿈을 지켜보면서 이건 키튼의 영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문인지 《북극》은 키튼이 자신의 아내를 살해하는 그 처참한 장면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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