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 구석 어딘가에서 민(주)노(동)당 당원증이 굴러다니고 있을 터이고 내 통장에서는 다달이 당비가 빠져나가니 난 민노당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귀(餓鬼)처럼만 보이는 우리당, 한나라당은 차치하고라도 민노당은 내게 그저 차악일 뿐이다. 물론 처음 민노당을 선택 할 때에는 최선이긴 했지만 내 의식은 결코 한 곳에 머무르지 못했다. 사실 ‘좆’도 아는 게 없으면서 말이다. 어쨌거나 지금의 우리는 (강제된)선택에 내몰려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난 ‘기필코’ 투표를 해야 된다는 것은 아니다. 정말 가능하다면 모든 사람들이 선거를 보이콧하길 꿈꾼다. 물론 불가능하다. 특히 “모든 사람은 파시스트다.”는 라이히의 말을 떠올리면 끔찍하기만 할 따름이다. 이제 겨우 200년이 지났을 뿐인 근대의 정치적 대의제에서의 시민들은 ‘참여’가 아니라 단지 정치적 정당성의 근거로 간주될 뿐이다. 처음 전혀 인식하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민노당에 ‘가입’하는 이유를 ‘정치적 정당성의 확대’로 들었던 기억이 난다. 선거제도를 기초하는 ‘동의의 원칙(모든 정당한 권위는 그 권위가 행사될 대상의 동의에서 나온다는 원칙)’은 권력에의 동의에 대한 평등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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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
영화 《짝패》는 결코 모방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그런 활극(살아있는 극)의 경지에 도달한 작품이다. 단지 예고편만으로 《킬빌》운운하다가 영화를 보고 난 뒤 그래도 《킬빌》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일종의 한계일 뿐이다. 나는 《킬빌》까지 만을 봤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이고 혹은 《킬빌》의 《슈라 유키히메》, 감독으로서는 ‘스즈키 세이준’ 그리고 홍콩 영화(잭키)들을 끼워 맞추는 것은 단지 영화광의 취향 나열일 뿐이다. 차라리 ‘운당정 혈투’에서 《와일드 번치》와 《돌아온 외다리》를 떠올렸다는 것(끼워 맞추기가 아니라)은 서툴지만 사랑스러운 애정고백이다. 실상 객잔에서의 혈투는 넘쳐나고-어린 시절 영화관에서 섭렵했던 그 수많은 무협, 주먹, 쿵푸영화 모두에는 객잔에서의 액션이 등장하며 《돌아온 외다리》의 오프닝은 객잔에서의 발차기 활극을 핸드핼드로 찍어낸다. 난 김희라와 백일섭, 이대근 등의 액션을 보고 자랐지만 그 이전 박노식의 액션을 보고 자라난 세대들 역시 영화 《짝패》를 보고 떠올릴 감흥은 비슷할 터이다. 한국에서 활극(가츠케키)을 받아들였던 방식은 일본의 검술과 홍콩식 액션 그리고 할리우드 액션의 짬뽕이었으되 제작비와 검열, 식민지와 전쟁과 가난을 극단적으로 돌파하면서 들끓었던 살벌한 공간의 판타지로 가공되었다. 박노식의 주먹 한방에 수십 명의 건달이 쓰러지기도 하지만 가죽재킷에 가죽장갑을 낀 건달 김희라는 조용히 앉아 피아노를 연주한다. 60년대 말에서 70년대 말의 풍경. 물론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삼천포로 빠진 것이다. 《짝패》는 다찌마와리는 아니지만 주먹액션은 맞다. 과거의 토양은 존재하되 그다지 거름이 되어주진 못한다. 류승완은 그 스스로 쌓아올린 거름으로 성장한 셈이고 그 거름은 시공간을 불문한다. 류승완은 현재 한국에서 가장 뛰어난 감독 가운데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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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날 ‘알아준다’거나 날 ‘좋아할 것’이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대신 싫어하거나 혐오하지 않게 만이라도 하기 위해서 노력했었다. 그런데 그게 결국은 같은 것이다. 세상의 모든 뽕쟁이들은 결국 그렇게 중독된다.
눅눅하고 냄새 가득한 반지하 골방에 날벌레가 들끓어 어제는 방 구석구석에 약을 뿌렸다. 숨구녕마저 다 틀어막아 놓은 습한 반지하에 뿌려진 약은 오도 가도 못하고 고스란히 내 코로, 눈으로, 입으로… 아니다 나는 그 습기와 먼지와 빌어먹을 악취와 뒤섞여 떠돌던 약물을 몸속으로 꾸역꾸역 처넣었다. 걸레로 바닥을 대충 훔치고 독약이 처발라진 밥그릇을 대충 헹궈내고 밥통의 밥을 박박 긁어 또 입속에다 처넣었다. 약과 밥과 먼지와 악취는 위액으로 잘 비벼지고 녹여져 썩어 흙이 될 몸뚱이를 하루쯤은 연장시켜줄 테다. 까짓것 하루쯤 단축시켜도 별 상관은 없다만, 극약을 처먹든 이밥에 고깃국을 처먹든 거야 아무렴 어떠랴.
책을 폈으나 몇 장 읽지도 못하고 덮어버렸다. 방 구석구석에, 몸 구멍구멍으로 스며든 약은 눈깔의 압을 미친 듯이 끌어올려 눈깔에 퍼진 핏줄을 싸그리 터트려 버릴 것만 같은 기세였다. 하긴 터지거나 말거나.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
광기는 사회에 속한 인간만이 드러낼 수 있는, 죽이고 또 죽여도 시커먼 머리를 쳐드는 불사의 바이러스다. ‘정상’이라는 말은 이미 ‘비정상’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세상은 미쳤다.’는 참이다. 고작해야 몇 천년을 미쳤을 뿐이지만.
지난 일요일의 꿈에서 세상은 시체로 가득했다. 난 살기 위해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월요일 친구의 해고소식을 들었다. 밥줄을 끊는 것, 간단하게 다른 직장을 알아보라는 것. 대부분의 노동자가 떠밀리는 곳은 계단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사다리에서 추락하는 것이다. 난 오늘까지도 시체로 뒤덮인 꿈속에서 살기위해 아득바득 일을 해야만 했다. 언제나 그렇지만 꿈과 현실은 대부분이 겹쳐진다. 피곤하다.
늦은 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향하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세상은 자기 꼬리를 잘라 먹으며 무한정 자라는 뱀이다. 문제는 무한정 자라는 만큼 위도 무한정 커지고 잘라 먹는 꼬리는 자라는 속도보다 조금 더 빨리 짧아진다. “쯧쯧, 이제 지 대가리마저도 씹어 삼키지” 명륜동 밤길을 걸어 오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