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7월
Monthly Archive
Mon 24 Jul 2006
잡담.[5] Comments

내 블로그에는 단 한 개의 배너도 없다(하긴 사람들이 거의 드나들지 않는 이곳에는 있으나마나긴 하다). 어쩌면 내 무의식에 희망은 없다는 믿음이 강하게 또아리를 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단 하나의 링크는 있다. 현재까지 이어지는 이라크 전쟁의 공식적인 사망자 집계이다. 39272~43731명, 물론 공식적인 기록이고 비공식적으로는 이미 2004년에 4만 명의 학살을 넘어섰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연쇄살인마라고 불리는 ‘흑사병’이 삼백년에 걸쳐 학살했던 인류의 숫자는 20세기의 시작이었던 1, 2차 대전으로 간단히 넘어섰다. 그리고 세계 대전으로 학살당한 인류의 수를 사회적 학살은 또 다시 가뿐하게 넘어선다. 간단히 2억 명 이상이라고 말해지는 학살의 수를 가늠해보기는 불가능하다.
어쩌면 인류 최악의 역병은 다름 아닌 인류 자신일지도 모르겠다. 나처럼 희망을 믿지 않는 죽어버린 사람들의 세계, 혹은 ‘정당한 전쟁’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이 벌이는 부당한 학살의 세계. 세계의 모두는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략을 반대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미국의 이라크 침략을 반대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결코 반대편을 옹호하는 근거로 사용되어져서는 안 된다. 북한의 미사일(이건 로켓이건) 발사가 옹호될 수 없는 것은 이미 이전에 북한의 다른 선택이 충분히 있었고 지금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권력을 놓을 준비만 되어 있다면 평화는 가능하다. 물론 그와 같은 희망은 품지 않는다. 미국정부가 평화를 사랑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지 않는 것처럼 이스라엘정부가 팔레스타인과 레바논을, 아랍을 보듬으리란 희망을 품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단 한순간에 사라져버릴 운명이 아니라면 나는 단 한명의, 희망을 말하는 사람이 있는 한 그들을 지지하겠다. 이스라엘과 미국과 북한 그리고 남한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이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그 정부를 반대한다. 침략과 학살과 광기를 끊임없이 생산하는 그들 권력을 반대하며 이 권력에 반대하는 이가 단 한명이라도 남아있다면 그들을 지지하겠다.
군대의 존재, 국민국가의 존재, 모든 전쟁을 반대하지만 이에 맞서 싸우려는 사람들에겐 그들의 편에 서겠다. 만약 사람들의 이성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당신은 손에 쥔 ‘총’을 부러트려야 한다.
[이스라엘의 학살전쟁을 규탄하는 서명운동] - 달군님
[STOP THE ISLAEL] - 니야님
Mon 24 Jul 2006
잡담.[2] Comments
아도니스님의 “급구! 通할 남자”라는 글을 보면서 피식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동병상련이라던가. 하지만 살짝 벌려진 내 입가로 피식피식 흘러나오는 웃음은 무려 서른 네 해 동안이나 솔로로 지내 몸뚱이 전체에 솔로 곰팡이가 활짝 피어버린―아 ‘조지 로메로’ 감독의 영화 《크립쇼》에 등장하던 레드넥 총각 ‘스티븐 킹’의 마지막 모습―내 자조적이 모습 때문이겠다. (거창하게)인류의 역사는 전쟁과 학살의 역사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발광하는 솔로의 애정분투기이기도 했다. 클레오파트라의 코 높이와는 상관없이 인간들은 자신의 연인(성별에 관계없이)을 소유하길 바랐었다. 역사의 고전들, 『금병매』의 반금련이나 『가루지기』의 옹녀와 같이 남성의 성적공포를 극한으로 밀어붙인 피조물들이 있었던 반면에 후대에 살이 덧붙여지고 깎여나가 새로이 창조된 피조물인 ‘카사노바’나 ‘돈 주앙’ 같은 섹스머신을 꿈꾸며 밤마다 마스터베이션의 열기를 뿜어내던 남성들 또한 얼마나 많았겠는가. 하긴 ‘말의 성기’를 이식한다는 『금병매』의 수천 년 된 사이즈의 환상이 이제 환상이 아닌 실제가 된 지금의 상상력 역시 고리타분하고 후지기 그지없지만 밤톨만한 거울의 환영 앞에서 또 초라해지는 어깨는 그렇고 그런 환상을 벗어나기가 애초에 글러먹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쨌거나 “급구! 通할 남자” 아니 “급구! 通할 여자”를 구함이라는 방조차 내걸지 못할 이 나약함은 아도니스님의 글을 보며 피식거리는 웃음 사이로 급기야 한 방울 혹은 반 방울의 눈물의 찍어내고야 말았다. 죄 많은 내 청춘.
영화 《달콤 살벌한 연인》에서 ‘대우’는 삼십년간 솔로로 지낼 수밖에 없었던 서러운 세월을 결국 외부가 아니라 내부의 요인에서 찾고자 정신과엘 방문한다. 오래되고 유명한 ‘너 자신을 알라’가 필시 그런 것은 아니었겠지만 내부를 알기 위해 외부를 찾는 건 저 언론의 선동적인 문구 ‘객관성’의 유령을 떠올리게도 한다. 어쨌거나 한 길 사람 속을 알기 위해서는 외과의보다는 정신과의가 탁월한 선택, 여기서 잘 드러나지 않는 한 가지. 일회방문 당 2~5만원에 이르는 상담비용은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는 그야말로 생계의 지장을 줄지도 모를 막대한 지출이라는 것. 마음의 안식, 영혼의 안식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돈’이 필요하다.
이래저래 솔로의 세월은 영혼도, 육체도 할퀴고 갉아버려 이제 더 이상 바랄 것도 없건만 그래도 通할 여자가 아니라 그저 通할 사람 정도는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아직까지 서푼어치 정도는 남아있다. 이 서푼, 내 싸구려 영혼의 값어치이기도 하고 소주 한잔의 값어치이기도 하다. 주머니가 다 비워지기 전에 어쨌건 通하고 싶다. 물론 세상이 그렇게 싸구려는 아닐 테지만…
Sat 22 Jul 2006
잡담.No Comments
[“이스라엘 어린이들이 사랑을 담아 레바논에 보낸 선물”] - 프레시안
[Children’s drawings in the subway!, How cute.] - AoG.2y.net
한 아이의 섬뜩한 문구 *독도는 (주)KOREA이다*
이어지는 기억 “이미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는 노무현의 말.
전쟁보다 더 나쁜 건 전쟁을 필요로 하는 세상이다. 한계 없는 성장이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성장을 위한 소모를 필요로 한다. 자본과 전쟁은 하나의 뇌를 가진 샴쌍둥이다.
Thu 20 Jul 2006
영화(들)1 Comment
미드나잇 무비- 심야상영 (8월 14일 24:00)
블루 벨벳 Blue Velvet 120min 마견 White Dog 84min 캐리 Carrie 92min
[시네바캉스 서울 : 영화와 함께 떠나는 특별한 여행!]
무려 한 달! 동안이나 계속되는 [서울아트시네마]의 프로그램을 도굴꾼의 마음으로 훑어본다. 물론 밤 11시에 일이 끝나는 나로서는 토·일요일만 갈 수 있을 테지만 “미드나잇 무비”는 꼭 가고 말테다. 《블루 벨벳》이 개봉했을 때 나는 군바리였고 내 친구는 장문의 편지를 영화감상평으로 대신했던 기억이 난다. “꼭 봐라, 그런데 부럽지?”, 난 사무엘 풀러의 영화를 한 편도 본 적이 없다. 《마견》의 비디오테이프를 수백 번은 들었다 놨다(91년과 92년 군에 팔려가기 전까지 거의 단 하루도 빠짐없이 하루 4편의 영화를 봤음에도) 했음에도 결국 보지 못했고 그 시절에도 전설이었던 영화는 여전히 전설로 남아있다. 《캐리》는 비디오로 볼 때와 친구들과 상영회를 열어 200인치에 가까운 스크린으로 볼 때의 공포감이 매우 달랐던 영화였다. 당연히 스크린이 압도적! 난 이 영화를 더욱 큰 화면으로 보고 싶다. 그리고 정말로 스크린을 통해 사람들과 함께 보고 싶은 영화는 《오즈의 마법사》, 물론 별 볼일 없는 노동력을 팔아야만 먹고 살 수 있는 나는 이 영화의 상영에 시간을 맞출 수 없다.
: 책을 읽다가 영화 《지상 최후의 사나이》의 대사 한 토막이 떠올랐다. “유럽의 병은 바람을 거슬러 운반된다.” 고전 《노스페라투》에서 쥐 때와 함께 몰려왔던 흑사병은 전 유럽을 초토화시키고 20세기에 다시 부활해서 (인간의)전세계를 박살내버린다. 14세기 중엽부터 17세기 중엽까지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흑사병은 후에 ‘드라큐라’라는 역병의 악마를 탄생시키고 사람들에 의해 증식되어가다가 기계문명의 시대와 함께 ‘프랑켄슈타인의 괴물’과 결합한다. ‘좀비’라는 살아있는 시체는 단순히 ‘부두교’의 주술적 이미지로부터 비롯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프랑켄슈타인의 조잡한 무한복제는 더더욱 아니다. ‘살아있는 시체’는 무려 7세기의 역사를 관통하며 인간을 집어삼켰던 역병과 이로부터 기인한 신의 징벌에 대한 공포, 그리고 기계복제시대의 대량학살이라는 잔혹한 인간성(미친 과학자로 등장하는)에 대한 근거 있는 공포의 결합이었다. 리처드 메드슨이 창조한 것은 흡혈귀와 괴물의 이종이자 동종교배이고 만들어진 흑사병의 공포는 조금씩 속도를 늦춰갔던 지난 3세기 동안의 흑사병과는 달리 《새벽의 공포》에서처럼 점점 더 빨라진다. 마치 광케이블을 타고 퍼지는 것처럼 보였던 역병 ‘사스’
7세기 전 흑사병이 처음으로 등장했을 때 이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몰랐던 것처럼 지금의 우리들 역시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당신은 ‘에볼라’ 혹은 ‘에이즈’에 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리고 이 모든 역병은 전파와 광케이블을 타고 전세계로 퍼져나간다. 우리 모두는 역병의 전달자이자 프랑켄슈타인이며 피를 빠는 피조물 ‘괴물’이다.
Tue 18 Jul 2006
영화No Comments
이번 부천에서 본 세 번째 영화, 《무서운 여자》의 첫 번째 에피소드는 그 케릭터의 설정에서 ‘모치즈키 미네타로’의 『좌부녀』를 떠올리게 된다. 물론 『좌부녀』의 케릭터는 절말로 무서웠으며 《무서운 여자》의 첫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귀신도 충분히 무섭다. 하지만 정말로 무서운 것은 바로 순환하는 그 공간이다. 굳이 구구절절 이야기할 필요 없이 다음 정성일 선생의 글 「폭력 공포 영화 속에 감춰진 ‘부동산’ 담론」을 읽으면 된다. 여기서 좀 더 알고 싶다면 다음의 책 「한국 아파트 연구」를 참조.
— Next Pag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