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9월


“(…)이렇게 공동체가 파괴되면 사회는 무수한 다른 방법으로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러한 사실은 사회학자들의 연구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오랫동안 존속해온 인간의 공동체를 해체하는 것은 생태학적 서식지를 파괴하는 것과 맞먹는 부정적 효과를 가져온다. 익숙하던 삶의 방식이 갑자기 정신적 상처를 남기며 변해버림에 따라 무질서가 발생하고 이 무질서는 범죄, 실업, 정신질환의 증가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내가 살던 동네 몇 블럭이 한꺼번에 불도저로 깔아뭉개질 때 그것이 인간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보라.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그때 느끼는 철저한 상실감과 혼란은 전시에 폭격을 당했을 때의 경험과 흡사하다고 한다(…).” [엔트로피 p193, 194] – 제레미 리프킨

상계동 올림픽 혹은 난쟁이 아버지의 아이들이라 부를 수 있을 도시빈민들의 강제퇴거가 미친 영향은 매우 극심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정신질환의 외곽인 평택은 매우 특별한데, 70년간 이어져 온 강제점령에도 끝끝내 부딪히고 싸워나간다. 그 차이는 분명 삶의 방식의 차이에서 기인할 것이다.

하종강 선생의 [노동자 권리와 역사의 순리]라는 글을 읽다가 한 부분이 ‘탁’ 하고 걸렸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의사노조가 설립됐고, 은행지점장들도 노조를 설립했다.’라면서 ‘그들 스스로가 노동자임을 느끼기 시작했다.’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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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에 쓴 우석훈 선생의 기사 [노대통령 “국민투표 한번 하시지요”]를 읽다 보니 지난달 말에 읽은 우석훈 선생의 책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가 떠올라 비록 하루 십여 명(아니 사실은 검색로봇 말고 오는지도 모르겠지만.:-)이 올 거라 짐작되는 이 블로그에도 이 책을 한번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다들 아시리라 짐작되지만.

하워드 진 선생의 책을 읽다 보면 유머를 모르는 좌파는 어울리기에 심히 불편하다(내가 좌판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유머라곤 쥐뿔도 없긴 하다)는 말이 나온다. 이를테면 ‘사회진보연대’에서 나온 [한미 FTA 이미 실패한 미래] 같은 책이 그렇다. 2004년 중순부터 2년 정도 FTA 관련 글을 설렁설렁 읽어왔는데, 거기서 머리 쥐나는 글만 뽑아 빡빡하게 엮어놓은 책이 [한미 FTA 이미 실패한 미래]란 느낌이 들 정도, 이 책에서 그나마 잘 읽혔던 부분은 사회진보연대에서 쓴 글들이 아니라 진보네트워크에서 쓴 글(7번째)이었다. 어쨌건 심각한 문제를 정말 심각하게 쓴 글이기는 하지만 나처럼 설렁설렁 살아가는 이에게 그리 권할만한 책은 아니다. 게다가 책은 ‘사회운동총서’라는 큰 틀처럼 운동의 관점에서 쓴 글이니 나 같은 이에게는 더욱 부담스럽다.

이에 반해 ‘명랑급진파’를 표방하는 우석훈 선생의 책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는 쉽게 설렁설렁 읽히지만 불량 비정규직인 내 가슴에는 아주 찐하게 다가오는 책이다. 내 연소득이 이것저것 덕지덕지 붙여도 고작 연 2,000에 턱걸이하기 때문만은 아니다(그럴지도). 우석훈 선생은 책에서 4인 가족 연소득 6,000이 되지 못한다면 “한국을 떠나라.”라고 말한다. 흠, 비정규직 800만은 우선 보따리 싸야겠지만 경제적 능력으로 볼 때 샘소나이트 삼종 가방의 속을 다 채우기도 빠듯한(이번에 이 가방이 공짜로 생기기에 한번 언급해봤다.) 우리 비정규직이 이 나라를 뜨기는 요원한 일이다. 아무튼 선생은 이 책에서 남한 인민의 대다수가 왜 보따리를 싸야 하는지를 쉽고 명랑하게(진 선생의 글을 떠올리면 유머러스하게) 주장한다. 아, 그래도 희망은 버리지 마시라. 인터넷 게임 ‘워 크레프트’는 싸게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의 미덕은 나 같은 막눈에도 아주 쉽게 읽힌다는 것이다. 책을 읽기 전에 가장 중요한 목차만 봐서는 여타의 머리 지끈거리게 하는 책들과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알맹이만큼은 누구나 쉽게 읽힐 만큼 엉킨 실타래를 부드럽게 풀어내고 있다.
얼마 전 911 다큐 ‘루즈 채인지’에 관한 논란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WTC가 폭파됐느냐, 붕괴했느냐, 다큐가 진실이냐, 사기냐의 갑론을박보다 마지막의 멘트였던 “당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라.”였다. 당신의 의문,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에 대한 진실한 ‘답’을 구할 수 있다면 음모는 더 이상 음모가 아니게 된다(물론 예외는 있다. 엘비스, 장국영 등.:-). 마찬가지로 우석훈 선생 역시 책의 말미에 ‘당신들의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를 잊지 않는다.

FTA가 무엇인가라는 궁금증(의 해소가 아니라)을 원한다면 우석훈 선생의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를 권한다.

페르난도 데 푸엔테스의 1936년 영화 《가자, 판초 비야와 함께!》는 대규모의 전투씬이 영화 내내 펼쳐지며 ‘서울아트시네마’의 영화 소개에는 “멕시코 영화사상 독재에 저항한 최초의 주류작품”이라고 되어있다. 하지만, 영화는 ‘독재에 저항한’이라기 보다는 농민(민중)의 관점에서의 혁명을 그려 보이고 있다. ‘판초 비야’라는 여전히 멕시코인들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이 영웅은 영화 내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는 ‘에밀리아노 사파타’와는 달리 영화의 후반으로 갈수록 매우 권위적이며 독재자의 면모를 보임으로서 영화의 시작에 등장했던 정부군(독재자 디아스 시절의 군대)의 장교와 다를 바 없음을 지적한다. 이는 이 영화가 결국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고 멕시코의 현실이기도 했다.

영화의 시작에 그려지는 농민들의 순수한 분노와 판초 비야의 옥수수 배급에 환호하는 농민들의 삶은 왜 농민들이 스스로 총을 들어야 했는가를 보여주지만 봉기한 농민인 ‘사자(Lion)들’에게 ‘사자들의 용맹을 보여라.’라며 사지로 내모는 판초 비야의 모습, 이후 자신들의 ‘용기’를 증명하지도 못한 채 죽어가는 ‘사자들’의 모습은 독재에 저항하며 스스로 총을 쥔 농민들이 ‘혁명’이란 대의 하에 어떻게 혁명이라는 거대한 틀에 속한 하나의 부품으로 전락하는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마치 러시아 혁명 이후의 소비에트 연방이 점점 전쟁국가로 변해가던 것처럼.

매우 혼란스러웠던 1914년의 멕시코에서 서울아트시네마의 소개처럼 ‘독재에 저항’하던 농민의 시선으로 그려보는 ‘혁명의 초상’은 결국 우울하게 끝난다. 대규모 전투씬이 등장하던 만큼 대지에 늘어져 있는 농민들의 시신은 그 자체로 소용이 끝난 하나의 부품처럼 이리저리 굴러다닐 뿐이고, 작전으로 말미암아 희생된 농민의 계급장은 마치 공깃돌처럼 아무 가치 없이 동료에게 넘어간다. 이들 농민이 원했던 것은 계급장이 아니라 혁명의 끝, 곧 편안히 농사지을 수 있는 땅과 삶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가장 젊어 ‘송아지’라 불리던 청년은 천연두에 걸려 ‘이제 이만하면 되지 않았나,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고’ 힘겹게 말해보지만 결국 그에게 돌아오는 건 버림받은 채 다 타버린 몸뚱이뿐, 마지막 살아남은 한 명에게 천연두의 감염을 두려워하며 “물러서”라고 말하는 판초 비야의 모습에서 농민의 모습은 결코 볼 수가 없다. 혁명이든 개혁이든 사람이 빠진 시스템은 결국 망가지고 피폐해지게 마련이다. 어쨌건 혁명에 관한 가장 우울한 영화.

덧 : 때문에 농민으로 태어나 농민을 꿈꿨던 사파타가 아니라 15세에 산적이 된 판초 비야를 선택했을 것이리라.

법은 사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이다.’에서 방점은 ‘자유’에 있고 이 ‘자유’라는 말은 흔히들 사용하는 삶의 형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재산권’에 관한 서구식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여 녹여낸 말이다. 물론 한국의 헌법만이 아니라 서구의 법들도 기본적으로 ‘재산’과 ‘생명’의 보호를 목적으로 한다. 단지 재산을 소유한 자들의 생명을 가리키는 것이다.
인권의 개념이 17세기에 등장했다고 하지만 지금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인권의 개념은 채 수십 년이 되지 않았다. 인권의 척도를 가장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계층에 비춰 살펴보면 수많은 나라에서 ‘아동’, ‘여성’은 여전히 ‘인간의 권리’에서 밀려나 있다. 20세기 중반에야 겨우 틀을 잡은 인권의 틀에는 안즉 기둥조차 놓이지 못했다. 그 법, 재산만의 투철한 사수를 위해 존재하는 법 아래서의 인권은 언제나 현재 진행 중일 뿐이다.
한번 만들어진 법이 쉽사리 고쳐지지 않는 이유는 위와 같은 그 법의 목적에 기인한다. 한번 움켜쥔 재산은 털어낼 수 없기에 법은 아래로부터의 요구로는 결코 고쳐지지 않는다. 단지 부숴버리는 방법만이 있을 뿐이다. 평택, FTA, 노사관계 로드맵 등이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가를 따져보면 이 법이란 것의 존재를 알 수 있다. 우석훈 선생의 말마따나 세계의 좋은 법률이란 법률을 모아서 만든 ‘대한민국 헌법’이란 것도 기본적으로는 재산, 가진자의 권리보호를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자본주의라 부르는 것, 증여에서 소모로 이어지던 이전 사회에서 갑작스럽게 증여가 이익을 발생시키는 사회로의 변화에는 ‘사람’이 끼어있다. 대추리 도두리의 주민들, 한국사회의 구성원들, 노동자 농어민들의 노예적 착취.
정말이지 무식하고 한심한 인간이라 행동은 하되 입은 닥치고 살고 싶지만 이 말라비틀어진 오장육부조차 눈, 코, 입으로 다 쏟아져 나올 것 같다.
노예로 살면서 많은 시간은 내기 어렵겠지만 적어도 24일에는 나도 같이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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