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님 보고 싶었어요. - 돕헤드
경축! 평택 대추리 김지태 이장님 석방 - marishin
이제 한 걸음…
‘한 사람의 허명은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밟고 선다.’
강호를 떠나 밭을 일구며 살아가던 ‘방강’이 다시 강호에 돌아오는 순간은 그 스스로 고백하듯이 끝없는 살육을 위해서 마련된다. 팔대도왕(八大刀王)이 등장하는 영화의 전반부는 단순히 사족. 팔대도왕에게 잡혀간 각 문파의 장로들을 구하기 위해 그의 아들들이 방강을 이야기 속으로 불러내고 이제 보는 이를 지치게 만들만큼의 학살이 펼쳐진다. 여기서 열아홉, 스무 살을 전후한 젊은 아들들은 잡혀간 늙은 아버지 대신 강력한 젊은 아버지를 대동하고 스스로 죽음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영화는 그야말로 살육을 위한 카니발, 젊고 아름다운 육체는 하나의 고깃덩어리로 추락하는 바로 그 순간을 위해 잠시 ‘반짝’ 빛나고 이후 그들의 시체가 겹겹이 놓인 산 위에 방강을 올려세운다. ‘獨臂刀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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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년에 이르는 아일랜드와 영국과의 싸움을 몇 줄로 써내려가거나 IRA(Irish Republican Army)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어쩌면 이 영화에서는 무의미할지도 모르겠다. ‘켄 로치’의 이전 영화 《랜드 앤 프리덤》에서처럼 이 영화 역시 과거의 사건을 기술하기보다는 과거를 통해서 ‘지금’을 말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랜드 앤 프리덤》이 ‘스페인 내전’이라는 상징적인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과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 말하고자 하는 것. 1997년의 현재와 2006년의 현재라는 불과 10년의 세월 동안 급박하게 변화해간 세상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동일하다는 것은 매우 중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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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運動)’을 규정하는 것은 시대별로, 주체별로 달랐지만 현대에 와서는 데카르트 이후의 규정인 물질적인 것에 한정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동양의 경우는 딱히 그런 것은 아니어서 ‘취직’과 같은 행위에도 운동이라는 딱지를 붙이기는 했지만 그것도 요즘에 들어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소수의 활동가들(한국에서의 활동가는 그야말로 극소수이다)에게만 사용되는 용어가 되기도 했다. 대신에 운동을 대체해서 활동(活動)이라는 말이 가끔 쓰이는데 ‘살아 움직인다.’라는 존재에 관한 이 말은 지금에 와서 ‘생활을 위한 물질의 획득’쯤으로 바뀌었다. 나의 활동은 나라는 주체의 행위이기보다는 생존을 위해 노동력을 판매해야 하는 객체의 위치로 추락한 것이다. 보통 ‘활동적인’이라는 말은 행위하는 사람을 주체로 놓는 것이 아니라 그가 몸담고 있는 ‘회사’와 같은 공간을 위해 열심히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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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리플리’ 씨가 그토록 사람들의 관계 속으로 깊숙이 들어설 수 있었던 이유는 너무나도 순수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돈으로 풍류를 즐기는 ‘필립’이나 필립만을 바라보며 자신만의 세계를 쌓아가는 ‘마르주’가 각종의 이익관계로부터 떨어져 있는 반면에 자신의 사업을 꾸려가는 냉정한 사업가인 ‘프레디’는 리플리에 대한 거부감을 노골적으로 표현한다. 물론 프레디가 리플리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는다는 말은 아니다. 이익 관계의 부대낌에서 낯선 이를 의심하는 것은 사업가의 버릇과 같기 때문이다. 친절한 리플리 씨는 가장 적절한 순간에 자신과 동류의 인간들을 발견했고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 욕망이 시키는 데로 행한다. 그게 살인이든 무엇이든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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