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3월


봄이오면 음악을 듣기로 했다. 지난 며칠 간 여기저기 인터넷 음반가게를 기웃거렸고, 십여 년 전의 기억을 짜내봤지만 당연히 나오는 건 없다. 얼마 전 보관함에 담아 둔 mario ranza box는 품절, mario baba box와 같이 주문하려고 했었는데. 음악 ‘따위’ 전혀 안 듣고 관심을 아예 끊어버린 지 십여 년이다. 본래 노래 제목 같은 걸 기억해본 적이 없으므로 그룹이나 가수 이름 정도는, 아니 장르 정도는 기억해야겠으나 그것조차도 깜깜할 뿐이다. 퇴근해서 아무 음악 하나 대충 틀어놓고 백종현 선생의 책을 펼쳤다…세상에 그 책이 눈에 들어올 리가 있나. 어제도 건물 밖에서 들려오는 음악 때문에 글 짜맞추기를 망치지 않았던가. 난 음악을 들으면서 글을 읽을 만큼의 멀티미디어적 인간도 아니고 고수도 아니다. 이상 아저씨는 음악을 들으면서, 글을 읽고, 사색까지 할 수 있었겠지.
책을 덮고, 어쨌건 한 달에 두어 번은 돈을 갖다 바치는 알라딘을 열었다. 김윤아의 노래를 그이만큼 잘 부르던 친구 덕분에 이 가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물론 ‘품절’이었다. 예상치 못한바 아니었으나, 이제는 가난하면, 음반사, 기획사를 따라잡는 부지런함(이 부지런함 덕택에 전 세계의 노동시간은 대충 두어 시간이 올라갔다)이 없으면, 음악도 들을 수 없고, 책도 못 읽는다. 내 보관함에 담긴 수십 종의 책은 품절이거나 절판이고 중고가게에도 없다. 팔리는 건 나오겠으나 팔리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다. 그나마 지금까지는 팔릴까 말까 싶어도 어쨌건 나오기는 했으나 이제는 ‘팔려야만’ 나올 것이다. 내 잔고를 어여삐 여기시는 하우스들에 경배를.
어쨌건 이제 봄이오니 음악을 들을 것이다. 우리 피조물들의 성인 mario ranza의 음악을 들을 것이고, 또 홉스봄 아저씨가 친절하게 일러준 그 길을 살짝 따라가 볼 것이며, 윤아 씨의 음반이나, 노이즈가든을 찾아야겠다. 집에서 대충 5~60여 장의 cd를 들고 왔으므로 한동안은 심심치 않을 것이다. 이제 박봉은 지나갔으나 난 여전히 굶주리므로 우선은 이것들의 먼지를 털어내도록 해야 하겠다. 메탈을 듣던 시간이 끊기고 이제 조금은 부드러운 음악을 듣고 싶지만 L7은 여전히 듣고 싶으므로 다시 해외사이트를 뒤져봐야 하겠고, Cinderella와 같은 이들도 여전히 좋아하므로 그들과 비슷한 것들을 알아볼 테다. 그러나 우선은 나 역시 이 자본주의의 부지런함(나와 세계를 좀먹어 들어가는)을 몸에 새기도록 해야 할 터이다. 나의 우울함을 헐값에 팔아, 당신들이 생산한 패스트푸드 치료제를 듣고, 먹고, 또 읽어서 나의 우울을 딱 팔아먹을 만큼씩만 쌓도록 하자. 음악이 반복되듯이 이것도 반복되도록 하겠으나 인간의 본질은 소모이므로 딱 그만큼의 반복만 있을 것이다.

해롤드 로이드의 《마침내 안전》은 이제 지겹게도 반복해서 마치 시골에서 올라온 인간군상의 전범처럼 느껴질 정도다. 이는 약간의 변주를 통해서 코미디로도, 로맨스로도, 심지어 공포로도 만들어지던 이야기다. 혹은 주성치 식의 홍콩이야기들. 아니면 이주일의 서울 이야기들. 《영자의 전성시대》는 이런 식의 이야기들 가운데 단연 걸작이다. 하지만, 해롤드 로이드의 영화를 보면서, 역시 추성치야 말로 21세기의 버스터 키튼이라는 생각을 굳혔다. 대신 성룡 액션 활극의 뿌리가 키튼의 스턴트에 있을망정 그가 이룩한 성룡표 영화/연기의 근원은 해롤들 로이드에 있다는 것. 몸을 사리지 않는 스턴트야 해롤드건, 키튼이건, 패티 아버클이건 그 누구도 서로의 영역에서는 최고의 액션을 보여준다. 액션은 이들 영화에서 최고의 볼거리를 선사하고, 또 당시의 관객들 역시도 그걸 많이 원했을 테지만, 그들 각자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와 캐릭터는 쉽사리 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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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트레야는 ‘남쪽’에 막연한 매혹을 느낀다.
항상 무덥고, 눈이 내리지 않는, 남쪽.
‘남쪽’의 상영 전에 ‘루이스 부뉴엘’의 ‘절멸의 천사’를 봤다. 세상에! 이렇게 재밌을 수가!!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는 ‘안달루시아의 개’ 이후에 처음 보는 것이다. 영화 내내 가득 찬 무겁고, 끈적거리는 농담들. 이 남쪽의 영화를 에스트레야가 봤으면 좋았으련만. 더욱이 ‘절멸의 천사’를 보고 지쳐있던 나는 ‘남쪽’을 보던 가운데 졸기까지 했다. 빅토르 에리세 감독 미안. 다음에는 꼭 맑은 정신으로 보도록 할게요.

나의 고향도 남쪽이다. 어머니의 고향도, 아버지의 고향도 남쪽이다. 제주도, 완도, 영도 이렇게 세 개의 섬이 내 삶의 묶어놓고 있으며, 나는 ‘북쪽’을 동경해서 서울로 올라왔다. 1981년에 부산에는 그 드물던 눈이 왔고, 나는 난생처음 눈사람을 만들었다. 내 머리통만 한 눈사람은 그날 부서지고 녹아버렸지만 난 ‘눈’을 영원히 사랑하게 됐다. 한때 남극은 내 동경의 대상이었고, 난 눈이 아름다운 사람에게 빠질 것이라 생각했었다. 물론 이제는 동경 따윈 접었고, 더는 누군가에게 빠질 일도 없을 것이라 여겨진다. ‘남쪽’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에스트레야와 남쪽에서 올라온 내 차이.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에 기만당하는 그 차이이다.
그제 눈이 내렸고, 앞으로 한동안은 빌어먹을 무더위를 견뎌야 겨우 눈을 볼 수 있는데, 눈을 기다리는 건 언제나 힘들다.

이번 [영국 프리시네마 특별전]에선 세 편의 영화를 봤지만 기억에 남을 영화는 오늘 본 〈하드 데이스 나잇〉뿐이다. 두 편의 린제이 앤더슨의 영화 가운데 〈만약에… If…, 68〉 는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중간에 잠들어 버렸고, 〈욕망의 끝 This Sporting Life, 63〉 은 지루했다. 대신 리처드 레스터의 〈하드 데이스 나잇〉은 정말로 즐거웠다. 어린 시절 ‘비틀즈’ 맴버라고는 ‘링고 스타’의 이름만 알고 있을 때 AFKN에서 잠깐 본 영화가 이 영화였다는 알아내는 새로운 즐거움도 있었다. 딴 얘기지만 한국의 영화관객들에게 가장 즐거웠던 시기는 AFKN과 정말로 다양한 규모였던 불법 비디오방 그리고 동시 개봉관의 천국이었던 80년대가 아닐까 싶다. 그때 가방을 학교에 팽개치고 비디오방으로 달아나던 그 두근거림과 해방의 기운이 이 영화에 그리고 비틀즈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에게서 뿜어져 나온다. 한 시간 반 동안의 축제, 어둠 속에서, 몸을 푹신한 의자에 파묻고, 쏟아지는 빛의 이미지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 역시도 그칠 줄 모르고 넘쳐흐르는 흥분의 현장에 들어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