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


[잉마르 베리만 특별전]
베르히만 감독의 ‘특별전’ 기사 제목은 ‘회고전‘으로 바뀌었고,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도 떠나갔다.

안으로도, 밖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우울한 날들.

[데쓰 프르푸]

이번 일요일의 영화보기는 실패에 가깝다. 《소유와 무소유》 한 편만을 보던가 아니면 전혀 계획에 없었던 《다이하드 4.0》을 먼저 보고 《소유와 무소유》를 봤다면 그나마 《다이하드 4.0》을 좀 더 즐길 수 있었을 텐데.
《소유와 무소유》를 보면서 내가 최근의 액션영화들을 왜 그렇게 재미없어하는지를 아주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장면, 장면이 살아있다는 것은 이러한 영화를 두고 하는 말이지 인물의 동선과 시선을 조각내고 몽땅 뜯어내서 현기증을 유발하게 하는 것은 결코 잘 찍은 영화라 할 수 없다. 그리고 과도한 클로즈업은 결국 난 영화를, 인물을, 상황을 잘 찍지 못함을 시인하는 꼴이기도 하다. 최근의 클로즈업은 인물이 처한 상황을 통해 그 인물의 현재를 설명조로 강조함으로써 관객의 순간적인 감정만을 자극하고자 하는 행태로 등장한다. 그럼으로써 사건의 생명력은 그 순간에 못 박히고 어떠한 지속성도 발휘하지 못한 채 휘발하고 만다. 영화가 끝나고 남는 것은 사건의 조각들도 아닌 깨진 유리의 부스러기뿐이다. 그것은 관객의 기억조차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그나마 《다이하드 4.0》은 단순한 이야기 전개로 이야기의 전체 구성은 기억되게 하는 미덕은 가지고 있다. 지랄 같은 현대영화가 그나마 남긴 미덕이다. 그리고 적어도 맥클레인의 귀환은 이전에 보았던, 그러나 전혀 기억나지 않는 몇 편의 영화에 비해 ‘볼만했다’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대머리 형사의 개고생은 있었다. 물론 ‘die hard’가 뜻한다는 꼬장꼬장하고 원리원칙을 고집하는 보수적인 형사의 귀환도 좋았다. 하긴 이 땅의 보수가 모두 죽어버렸으므로 비교 대상이 없음이 안타깝긴 하다.
어쨌건 《다이하드 4.0》이 지녔을 또 다른 미덕은 《소유와 무소유》로 인해 몽땅 날아가 버렸음이 분명하다. 나는 영화에 대한 전문 지식이 없으므로 《소유와 무소유》의 즐거움에 대한 내 반응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난 이제 하워드 혹스의 모든 영화를 보고 싶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영화는 내게 매우 예외적인 사건일 배우의 이름을 기억하게 했다. ‘로렌 바콜(Lauren Bacall)’. 그는 첫 등장과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그! 몸동작으로 필름을 영원히 살아남게 한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조갑제와 강준만 - 김규항]

오늘날의 민주주의가 사실은 ‘과두제’인 이유이다. 더불어 신자유주의가 탄생할 수 있는 배경이기도 하다. 초기 자본의 흐름을 만들어 낸 이들이 탄생시킨 자유주의는 그 자체로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자본의 지배집단으로부터 탄생한 자유주의는 이미 신자유주의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신자유주의가 자유주의를 뿌리로 해서 자라난 것은 아니다. 신자유주의는 자유주의의 뿌리를 뽑아내고 그 아래 파묻힌 유적을 재발굴 한다. 비슷한 이름이나 자유주의가 반발력의 힘으로 태어났다면, 신자유주의는 반발력을 가능하게 한 그 힘을 추스르고 의미를 재조립한다. 바로 지배세력의 민주주의, 시민의 민주주의가 그것이다. 피라미드의 뚜껑을 기준으로 뾰족이 솟은 일각이 시민이라면, 그 아래 나머지 전체는 시민이 아니다. 그것의 역할은 고작 수십 톤이 나가는 뚜껑을 지지하는 역할, 곧 노예의 역할이다. 대신 사람들은 꼭대기로부터 늘어진 한 줄의 썩은 동아줄에서 어떤 희망을 본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니까”라며 이러한 사태를 매우 당연시하곤 한다. 미안하지만 지금 이것을 자본주의라고 말한다면 공부 좀 하시라 말하고 싶다. 그게 내가 플라톤을 읽으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실상 오늘날만큼 ‘개인주의’가 더욱 중요했던 시대는 없었다. 어찌 지금 당신의 이익이 침해받음에도 그저 ‘자본주의 사회니까’라는 말로 회피할 수 있는가? 차라리 ‘노예가 무슨 힘이 있어서’라고 말하는 것은 더 바람직하다. 자본의 성장에 따라 생겨난 자유주의는 ‘경제행위’를 중심으로 태어났기에 자유주의가 탄생시킨 개인주의는 자연히 개인의 경제적 이익을 중심으로 한다. 바로 사적소유의 불가침이고, 새로운 ‘자연권’이었다. 그러나 지금 자연권이 인정되는가? 당신의 임금은 언제든지 사측에 의해 묶일 수 있으며, 개인의 자유로운 경제행위는 사회라고 말해지는 기업체제에 의해 심각한 제약을 당한다. 학교의 교과목은 국가를 옹립하기 위한 것이기보다 오히려 기업의 프로그램을 따른다. 자유주의와 개인주의가 파산하고 그것을 인수한 신자유주의는 결코 인민의 민주주의를 원하지 않는다. 아마도 가장 혼란스러울 정체인 민주주의는 언제나 파멸을 씨앗을 품고 있으나, 그것을 일부의 지도체제 아래 놓아 관리하는 것은 인간적 삶과는 전혀 무관한 사회를 마련한다. 민주주의(民主主義, democracy)는 ‘인민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시민에 의한 지배’를 말하며, 이것을 인민에 의한 지배로 가능하게 했던 흐름인 자유주의가 그것이 가진 부정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가장 큰 긍정적이며 영향력 있었던 측면이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는 이 ‘인민’의 측면을 다시금 없애고, 경제행위의 주체라는 경제와 결합한 시민만의 민주주의를 이루려는 흐름이다. 인민은 사라지고 일부의 시민만이 지배하는 세상. 그리고 시민의 대리자(국회의원)만이 알아서 기며 겨우 살아가는 세상이 바로 지금 여기이다.

RaFFiS 2007 무한계 음악축제
RaFFiS가 뭔 말인지는 모르겠다만(알고 싶지도 않다), 공연에 출연하는 것들이나 공연을 보러 가는 인간들이나 참 이해하기 싫다. 특히 평소에 사회성(?) 발언 나부랭이쯤 한다고 꼴값 떨던 것들의 추태는 참으로 거시기하네. 한동안 나처럼 무식한 놈은 입 다물고 열심히 들어주는 게 세계평화에 이바지하는 것이라는 매우 바람직한 생각에 조신하게 생활했건만 이것들은 보자 보자 하니 더 무식한 놈들 아닌가. 많이 배우고 많이 안다고 유식한 게 아니지. 나와 사회의 관계를 살피지 않는 놈은 알아도 아는 게 아니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예의가 없는 놈은 박사 학위 백 개를 따봐야 화장실 신문 쪼가리만도 못하다. 적어도 화장실 신문 쪼가리는 잘 비비면 유용하게라도 쓰지.
근데 “모든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대형 갈라쇼 형태의 공연”은 도대체 무슨 말인지…그냥 ‘모든 새대가리 행태의 공연’으로 이해하기로 함(닭대가리는 뺌.:-).

Next Pag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