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


[대한늬우스]

웃기기 때문에 더 걱정된다.

김민웅 교수가 ‘울산 단일화, 제비뽑기를 하라’고 했다. 누가 더 뛰어난 후보인지 가늠하기 어려우니 차라리 추첨을 통하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안지식연구회 이영제가 반론했다. ‘제비뽑기는 슬픈 코미디’라는 것이다. 둘 다 맞는 말이다. 추첨제만큼 공평한 것은 없다. 흔히 말하는 팔자소관이란 말과 같다. 여기에는 긍정과 부정이 동시에 담겨 있다. 그러나 이영제의 말도 맞다. 세상만사를 뽑기로 처리한다는 건 웃기는 일이다.
그런데 두 사람 다 ‘뽑기’를 긍정·부정하면서 내세운 논리는 매우 간단하다. ‘다들 훌륭하시니 뽑기를 하자’와 ‘아니다. 그건 좀 웃기다’는 논리다. 물론 이영제는 반론이니만큼 조금 더 상세하다. 그러나 ‘울산단일화’라는 조건에 한정해서 말한 김민웅의 글을 두고 ‘제한적으로만 가능’이라는 반론은 잘못된 독해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각각 한정된 기간을 대상으로 한다. (more…)

“(구글코리아가) 표현의 자유와 권리가 우선됐으면 한다고 했는데 오히려 본인확인 절차를 거쳐서라도 올리고 싶다는 이용자의 표현자유를 제한한 것”

한 집단에서 단 1명이 좋아하는 영화는 좋은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
한 집단에서 단 100명이 좋아하는 영화는 좋은 영화일 것이다.
한 집단에서 1,000명이 좋아하는 영화라면 이상한 영화다.
한 집단에서 10,000명이 좋아하는 영화라면 무서운 영화다.
집단의 다수가 좋아하는 영화라면 잔혹한 영화다.

물론 이것은 어떤 감독(잘 알려진)의 말을 부풀린 것이다. 집단의 체험이 같다고 해서 같은 느낌표와 물음표를 던진다면, 그것은 무서운 것을 넘어 잔혹한 것이다. 사람들은 잔인하고 혹독한 것을 넘어(피를 먹고 자란다는 표현)서야 자란다고 말한다. 그건 거짓말이다. 피를 본 동물은 더욱 잔인해지고, 피를 본 사회는 더욱 혹독해진다. 역시 내가 한 말은 아니다. 16세기 어느 프랑스인의 말을 살짝 바꾼 것이다. 이러한 세계는 ‘성냥공장 소녀’가 살아가는 세계다. ‘괴물’의 세계, ‘실미도’ 따위에 갇힌 자들에게나 가능한 세계다.
어떤 한 편의 영화에 환호하고, 열광하는 따위의 짓들. 쓸모없는 짓은 아니다. 외려 누군가에게는 정말로 득이 되는 짓이다. 세상을 컨베이어 벨트로 인식하는 이들에게 이들 추종자 집단만큼 이로운 자들 또한 없다. 이미 핑크 플로이드가 비슷하게 보여줬던 이야기다. 그러나 열광만큼 간단하고 손쉬운 것도 없다. 뜨거운 심장과 쓰지 않는 1.3kg의 회백색 덩어리만으로 충분하다. 굳이 전두엽이 손상될 필요조차 없다.
20세기에 돈 시겔과 카펜터는 조종을 울렸다. 단 한 종의 ‘신체강탈자’만으로 충분하다. 단 하나의 ‘광기 어린 입’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러듯 잔혹한 상상은 종종 현실이 된다.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건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이 아니다. 그것은 좀 더 복잡하다. 그러므로 사태의 전개를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마치 ‘알카트라즈 탈출’을 설계하던 프랭크와 같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영화로도 가능하다. 만 명의 사람들이 말하는 만 가지 이야기를 가진 한 편의 영화. 그러려면 텅 비고 병든 뇌를 채우고 치료해야 한다. 방법은 공부뿐이다. 지금은 ‘일요일엔 참아’도 됐던 일리아의 세계가 아니다.

국가 설정에서 ‘한국’대신 호주나 홍콩, 미국 등 다른 나라를 선택하고 언어로 ‘한국어’를 설정하면 종전처럼 서비스 이용이 가능하다.

외국어를 공부해둬야 할 이유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