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진지하게 평택, 대추리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면 그곳으로 가는 방법이 가장 최선의 선택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면 적어도 관심을 가지고 찾고 들어 보려는 노력은 있어야 한다. 평택에 관한 글들을 보다가 “이번 사건 기사나 사진을 보면, 한가지 의문점이 든다. 바로 시위자 대부분이 상당히 젊은 사람들이라는 것.” 모 블로거(아무런 말도 없이 링크를 걸었던 점은 명백한 내 잘못이다. 아무런 의식없이 하는 행동이 때때로 심각한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배웠다.)의 음모론 적인 시각의 글을 봤다. 그리고 포털을 장식하는 글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이들에게 대추리에서 태어나 70평생을 군대에게 치어 살고 쫓겨 다녔던 사람들, 바다를 메워 옥토를 만들고 그 땅을 일구며 한 평생 살고자 했던 사람들은 아무런 중요성도 없다. 다만 그들을 움직이는 손, 빅 브라더에 대한 1984적 음모론뿐이다. 혹은 ‘진지한 법적 접근’, 어쨌건 법대로 하자는 이 잔인한 태도는 05년 헌법소원도(2월 24일 각하 결정), 여타의 다른 진지하고 이성적인 대응도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며 법적 판결의 늘어지는 시간에 비해 평택의 군 투입은 2년 전이나 지금이나 당장의 삶을 파괴하는 문제라는 점을 제쳐놓는다.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 법적 접근이나 시위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당장 누군가 당신의 집을 파괴한다면 당신은 법적으로 갈 것이냐 아니면 그들을 막을 것이냐를 두고 고민하겠는가? 두 가지 모두는 동시에 이뤄진다. 어쨌건 지금 대추리에서 떨어져 있는 이 따위 말보다 당사자의 목소리를 정말로 진지하게 읽어 보자. 직장 해고의 공포 때문에 대추리에 있지 못하고 단지 몇 푼의 돈으로 때운 내 모습이 너무도 초라하고 부끄러울 뿐이다.
다음은 방승률 할아버지의 말이며 원 글은 [평택범대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방승률님 말씀 - 평화바람
방승률님 (70세) 인터뷰 : “여기서 평생을 살다가 뼈를 묻을라고 했는데”
“그러니께 동네가 길게 돼있고, 그냥 총총 들어매기고 그렇지”
- 부모님 고향은 원래 어디세요?
나는 여기서 태어나 여기서 칠십 평생을 살은 사람입니다. 근데 1950년에 6.25 전쟁이 터지면서, 한 1년쯤 후에 51년도[52년도가 맞다] 될 꺼야, 그때가 음력 팔월보름께 되는데, 갑자기 여기 비행장이 생긴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작업을 저 안정리 쪽에서 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동네로다가 도자가 들어오드라구. 음력 팔월보름 때 명절을 쇨라고 다 떡살을 전부 담그고 했는데, 막 도자가 와서 집에다 흙을 붙이니까 동네사람들이 당황해가지고, 명절을 쇠야 하는데 그냥 도자가 흙을 막 들어다 붙이니까 어이가 없지. 그때 수수니 콩이니 전부 영글었을 때거든. 그때 정부한테 하소연 한마디 하지 못하고 그때 쫓겨난 거야.
- 그러면 그때 어르신 나이는요?
내가 36년생이여. 열여섯 살 때였지.
- 열여섯 살 때 갑자기 쫓겨왔는데 어떻게 사셨어요?
그때는 6.25 때는 정말 밥먹는 것이 굉장히 힘들었잖아요. 아침밥 저녁죽. 그것도 아침밥 먹으면 잘 사는 거여. 잘 사는 사람이나 아침밥 먹지. 증말로 춘궁, 보리고개하는 것이 그때 나온 말이여.
- 팔월보름날 추석 쇨라고 하는데 쫓겨나오셔서….
명절을 못 ㅤㅅㅚㅆ지요. 그렁게 그때는 나무가 귀해가지고. 초가지붕이니까. 전부 그걸 개개인이, 누가 도와줄 사람이 없으니까, 자기 집은 자기가 뜯어서 짚, 썩은새, 지붕을 벳겨가지고 전부 다발로 묶어서 싸놓는 거여. 그러면 낮에는 짚을 뜯고, 새벽에는 동네사람들이 전부 짚을 날라다 줘. 그렇게 작업을 했어. 단체가 돼가지고. 그래가지고 그때는 현재 우리가 사는 부락에는 [땅이] 개인소유여 전부. 그러니께 내가 여기다 집을 짓겠다 하면 땅주인은 “아야.” 소리를 못했어. 그러니께 정부에서 그거 하나는 혜택을 준 거여. 보상은 안줬어도. 그러니께 동네가 길게 돼있고, 그냥 총총 들어매기고 그렇지.
- 이 집터는 바다는 아니었죠?
여기는 아니었지. 신흥 뒷동네가, 갯고랑이 하루아침에 이리 왔다 저리 왔다 그래. 그렇게 변해. 오성면 땅이 전부 이쪽에 갖다 붙인 거야. 논이 모두 푸른색이니까. 바다를 막아가지고. 여기 논을 조성하려고. 여기가 땅이 넓어지니까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도두2리 사람들이 형성해서 온 거야. 그때 인자 그 사람들이 신흥 뒷도락을 조성한 거지. 그때는 제방을 막기 위해서. 여기 농토가 좁으니까. 바다가 육지로 변했으니까 엄청난 고생들 했지. 지끔마냥 장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여덟 사람이 가래질 해. 여덟 사람이 힘이 하나가 돼야 힘이 덜 들고, 한 사람이 삐끗만 해도 흙밥이 날라가질 않아. 그게 가래여 가래. 그걸로 초입 쌓고, 그 담에는 지게로다가 지는 거야. 삽질해서 뚝을 쌓는 거야. 지끔 여기서부터 계양으로 간 제방이 거의 다 그렇게 쌓은 거야.
“나무가 가려가지고 우리 동네 찾아오기가 힘들었어”
- 대추리 사실 때 2천 평 논은 어디에 있었어요?
요 앞에 있었어. 논은 편입은 안됐죠. 산만 들어갔지. 산은 지금 미군들 숙소 진 데 있잖아요. 그리 한 9천 평 있었어요. 야산이죠. 그 당시 야산은 나무가 굉장히 많았죠. 일본놈들이 이 비행장 닦았을 적에는 나무가 가려가지고 우리 동네 찾아오기가 힘들었어. 그런데 해방이 되니까 니 산, 내 산이 없어. 그냥 힘있는 사람은 막 짤라다가 서까래 맨들어서 집 질라고 막 베오고, 나무를 싹 베니까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거야. 불과 순식간에 없어지는 거야. 벌건산이 되니까 나무 해다 땔 수가 없잖아. 연료가 없잖아. 그때 당시에는 6.25 전쟁인데, 나무뿌리를 캐요. 그걸 캐다가 짤라서 때고 살았고, 그거마저 없어지니까 잔디뿌리를 캐다가 때고 살은 거여. 6.25 터지니까 더군다나 그것도 저것도 없잖아. 그러니께 어디 가서 나무를 해왔느냐면, 지금 저짝으로 보이는 산 있잖아요, 아산 땅. 거기 가서 나무를 해다가, 그것도 순전히 등짐으로. 걸어가서 해가지고 등짐으로 져다가. 그렇게 해가지고 살았어요. 말도 아니지. 지금 사람들이 그렇게 살라고 하면 살겄어? 천만의 말씀이지.
- 왜정 때는 비행기가 많이 뜨고 날고 그랬나요?
왜정 때 여기 비행기 몇 번 떴다 내렸다 했지. 그런데 비행기가 앉기만 하면 고장나. 그러니께 전부 분해해가지고, 트럭으로 일본놈들이 싣고 나가는 걸 우리가 봤지. 그런데 여기 사람들이 왜 그런 현상이 있다고 보느냐면, 비행장 안에 홍학사라는 산소가 있었어. 지금 저기 본정리에. 그때 이전한 거여. 근데 그분의 산소가 거기 있었기 때문에, 그걸 지킨다. 왜놈들이 비행기만 와서 앉으면 고장이 나니까. 떠가는 건 딱 한 대 봤어.
- 아버님은 언제 돌아가셨어요?
아버님을 일찍 여웠어요. 일곱 살 때. 아버지 얼굴은 기억하기가 가물가물해요.
- 그러면 어머님이랑 사신 거에요? 그러면 어머님은 언제 돌아가셨어요? 아, 어제 삼오….
어제 삼오제…. 난 독자여.
- 여기 사시다 쫓겨나실 때도 어머님 모시고 오셨겠네요?
그렇죠. 그때 쫓겨나올 적에 여기 사람들은 참 단결이 잘 됐어요. 각자가 낮에 전부 짚을 뜯어서, 지푸라기를 묶어서 반으로 묶어 놓으면, 새벽에 일찍 일어나가지고 그걸 집집마다 전부 쌓아주는 거야. 그러고, 저녁이면 모하느냐. 집지을 자리를 다져. 밤에 한 열시까정, 하루에 두 집, 세 집 그렇게 터를 다져가지고 그렇게 하고 집을 짓게 되었어. 그러니께 주야간도, 잠자는 시간은 없었지. 아드막하지. 지금 같으면…. 아드막해. 어떻게 해나왔는지.
- 마을 옛날 이름이 어떻게 돼요? 일반, 이반, 삼반, 사반으로 부르던데….
지명은 대추리가 맞고 일반, 이반, 사반은 반에서 부르기 편리하게 한 거고. 녹두밭머리 그거는 잘 모를 거여. 녹두는 거름이 많으면 딸 수가 없어. 그러니께 여기는 빈곤층만 산다 그 뜻이여. 곤주머리라고 하는 데는 원래 지명이 어렸을 때부터 불렀어. 곤주머리는 사반이죠. 일반에는 빈곤층이 많이 산다 해서 녹두밭머리. 옮겨오다 보니까 없는 사람은 이짝에 몰렸고, 있는 사람들은 저짝에 몰렸고.
“우리 지역 사람들의 피와 땀이 엉킨 땅인데, 그것도 한번도 아닌 두 번 세 번”
- 땅을 빼앗기시게 됐는데 심정은 어떠세요? 이루 말로 하실 수 없으시지만….
땅을 뺏긴다는 생각하면 참, 마음이 굉장히 착잡해져. 우리가 이 땅을 개간할 적에는 정말로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한다.] 배가 고파서, 아주 그 어려울 때 맹글어놨는데…. 이 우리 지역에 있는 사람들의 피와 땀이 엉킨 땅인데, [말을 잇지 못하고 콧물을 닦으신다.] 그것도 한번도 아닌 두 번 세 번…. 인저 여기서 평생을 살다가 뼈를 묻을라고 했는데. 그 말을 어따 대고 얘기해요. 억울하기 짝이 없지요. 그 땅을 조성할 적에는 잘 먹을 때도 아니고 아주 배고픈 시절에, 그것도 기계가 아닌 사람이 인력으로 지게질해서 갖다 제방을 막고 바닷물하고 싸워가며 공사를 했는데, 해서 땅이 정말 옥토가 됐는데, 지금 뺏기게 된다면 억울하기가 짝이 없죠. 이 근방에 사시는 분은 전부가 그런 일을 했으니까. [잠시 말이 멈춘다.]
지금 나이가 젊은 것도 아니고, 인생의 황혼길에 접어든 사람이 고향을 떠나면 어디가 살 거며 그것도 막막하고, [다시 말을 잇지 못한다.] 사실 지끔 1년이 넘도록 투쟁을 해고, 지역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그 동안에 참 각 사회단체에서 이 지역 사람들을 위해 도와줘서 여기까지 버텨나왔는데, 어떻게 막어야 할지 그것이 참 어렵습니다.
정부는 뭐 자기네들 권력 있다고 해서 그냥, 주민들은 생각지도 않고 자기네들 법대로만 추진핼려고 하는 그런 작태가 정말 한심스러워요. 나는 뭐 민주화, 자유화해서 세상이 특별하게 달라질 줄 알았어. 그런데 겨우 그 사람들이, 지끔 정권을 잡고 있는 사람들이 아주 입에 붙인 듯이 ‘군사정권 군사정권’ 했어요. 군사정권보다 달라진 게 뭐가 있어. 오히려 군사정권보다도 못하게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민주주의가 머요. 열렸다고 해서-, 뭐가 열린 게 있어.
어느 나라던지 국가는 국가대로 국민은 국민대로 있는 게 아니고, 국민이 있어야 국가가 있는 건데, 지끔 여기 사람들의 심정은 하나도 반영이 안 돼요. 내가 그 평택시발전위원회를 한다고 해서 거기까지 가 봤어. 가서 회의를 하는 내용을 보니까 증말로 울화통이 터져가지고 발언권을 받아서 한마디 했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우리를 등에 업고서 평택발전만 할라고 하는 상태밖에 안되더라구요. 우리를 도와줄려고 하는 사람은 없어요 없어. 평택시나 의회나 평택시발전협의회나 똑같으더라고. 그래서 거기서 한마디 퍼부었더니 거기 앉은 분들이 동조를 하더라고.
이게 지끔 평택시민들이 자기 코앞에서 불이 났는데도 강 건너 불 보듯 해고 있는데, 이게 앞으로 평택시가 발전이 되느냐…. 물론 기지촌 주변의 상인들은 좀 나질는지 모르지만 전국적으로 어디던지 미군이 주둔해있는 시에는 발전이 안돼요. 일단 우리가 미국 기지에 수용이 된다고 보면 시 발전이란 건 그걸로 끝이야. 자기네들은 공무상 우선 국민을 속이더라도 그렇게 해야만 되니까 바랄 게 없지. 다만 여기가 부안사태마냥 그렇게 전 시민단체가 일어나서 투쟁해기 전에는…. 그렇게 해야만 막을 수가 있어. 그렇게 못하면 막을 수가 없어.
이, 미국놈들이 우리 땅에서 안 물러가요. 안나가요. 안나가. 왜 안나가냐. 내 이 부대도 종업원으로 댕겨봤어. 미사일 기지 한국 정부에다가 인수인계할 적에 내가 바로 그 인수단 사업소에 있었는데, 요놈들이 떠난다 떠난다 하면서도 집은 들고 지어. 느들 왜 떠난다는 놈들이 집을 들고 지냐고 그러니까, 지들은 걱정할 거 없데. 지들은 떠나도 떠날 적에는 한국정부에서 새 값으로 댓가를 받는대는 거여. 그런 놈들인데. 지금 우리 국민들이 알고 있는지는 몰라도, 우리가 땅을 빌려줘도 한국정부에서 사용료를 받던가 해야 되는데, 미군주둔해 있는 그 사람들 봉급을 거의 다 주는 거여, 우리 정부에서. 그걸 알어야 돼. 미국정부에서 주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그놈들이 세계 각국에 가서 놓고 퍼뜨려놓고 전쟁을 일으키고, 딴 나라 국민들더러 와서 죽어달라 그러는 거 아녀. 전쟁비 물어라 뭐. 다 세계를 점령하려고 하는 놈들이 그 따위로 하는 거야.
“독자 자식 고생 덜 시킬려고 그렇게 별안간 돌아가신 것 같아요”
- 최근에 어머님이 돌아가셨는데 아주 굉장히 마음이 아프시겠어요….
마음이 아프죠. 옛날이 어머니 생활허시는 거 내가 죄 겪고 산 사람이니까. 또, 나는 초등학교밖에 못나온 사람이야. 갈 수가 없었어요 그때는. 그때는 무슨 생각이 있었느냐면 내가 학교를 가면 우선 학비를 댈 걱정, 또 집에서 일을 못할 걱정. 그것 땜에 사실 못 갔어. 가래도 못 갔어. 그때 중학교 한번 들어갈려면 소 한마리 값이 들어갔어. 그걸 어떻게 대요. 내가 나가면 어머닌 더 힘들어질테고, 그래서 학교를 포기했어요.
- 어머님이 오랫동안 아프셨나요?
아니요. 가옥실태조사[국방부의 지장물조사] 나온다고 노다지 동네 앞에서 지켰잖아요. [2월] 14일까지 했는데, 15일 날 새벽에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그때 저녁 진지도 잘 잡숫고. 어떻게 생각하면 미군부대 확장을 막는 데 대책위원들이나 부락사람들이 고생을 덜 하게 하기 위해서, 그것이 막 끝나고 나서 돌아가셨고, 또 내가 독자니까 독자 자식 고생 덜 시킬려고 그렇게 별안간 돌아가신 것 같아요.
- 어머님 연세가….
93세요. 사실만큼은 사셨는데, 그래도 마음은 편치 않아요. 옛날 어머니 살던 생각하면. 그래서 내가 지끔도 그래는겨. 손자들한테, 어머님 생신 적에는 무슨 일 있어도 빠지지 말고 와라. 내 생일 때는 안 오더라도 어머님 생신 때는 꼭 와라. 그래가지고 걔들이 꼭 지켜줬어요.
- 어르신이 어머님에 대한 사랑이 아주 지극하시네요.
초년에 혼자 돼가지고 자식하나 기를려고 수절을 해가지고 혼자 사셨는데, 그걸 몰르면 안되죠.
- 이 싸움이 어떻게 될 것 같애요? 또는 우리가 이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요?
글쎄요. ‘정부가 하는 일이니까’, 이렇게 시에 나가면 그런 소리를 해. 근데 여기도 막을라면 부안 같은 그런 행동하기 전엔 어렵고, 지금 국방부 팀이라는 사람들이 도대체 자기네들 권리 있다고만 행세하기 때문에 그것이 문제야. 대책위가 이미 서있는데도 협의를 하려고 하지를 않어. 지들이 꼭 필요하고 불가피하다면 대책위하고 협의를 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이 지역에서 피를 볼 수밖에 없어요. 누가 죽던지, 죽고 살고가 나올 거에요. 앞으로 봐요. 이게 그대로 진행되면 틀림없이 그런 현상이 나올 거요.
- 정부는 예를 들면 대토를 소개하고 정착금을 준다면서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하는데요.
정착금이 얼마나 되겠어요. 이 지역주민들을 과연 우리나라 국민으로 인정하는지를 모르겠어. 이북에서 넘어온 사람들은 정착금을 주고 생활터전을 마련해 주는데, 사전에. 지금 우리나라 정부에서는 대책없이 권리로 밀어낼라고 하는 것ㅤㅂㅐㄲ이 없잖아요. 권리로. 대책이 없잖어. 그러니까 지금 정부에서 이 지역 주민들을 과연 우리나라 국민으로 인정을 해주는지가 의문여.
- 올해 농사 이런 심정으로 지으시니까 어떠세요?
마음이 무겁지요. 그러나 살기 위해서는, 죽기 전엔 해야지. 죽기 전엔 해야지.
- 오래 일을 하셨기 때문에 논에 가면 마음이 편안하시다거나 괴로울 때나…. 젊은 사람들도 일하기 굉장히 싫어하잖아요. 어르신은 일할 때 어떤 기분이 드세요?
아- 우리세대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 거란 말요. 6.25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일어난 사람들이 우리 세대라고. 그러니까 힘든 일, 고된 일 가리지 않는 것이 바로 우리 세대지. 지끔 젊은 사람들 쪼끔만 힘들먼 안헐라고 허잖아요. 그러니께 우리세대하고 젊은 세대하고 차이가 그거요 바로. 세대차이라고 해지만, 차이가 그거요. 우리는 어려서부터 배고픈 거부텀 알고, 잘 먹고 사는 것도 알고, 노력핼 줄도 알고 그랬으니까 달르지.
- 지금 가장 큰 걱정거리나 올해 소원이 있으시다면?
걱정거리라면 지금 이주대책이 제일 문제겄지. 또 어디로 가서 살아야하는지 대책도 안 서고. 또 소원이라면 미군부대확장을 꼭 막아내야 한다. 그래야 이 지역에서 평생을 살수 있다는 것. 후손들까지도. 그게 소원이지.
- 대책위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젊은사람들. 일 하는 게 든든해 보여요?
예. 참 그 사람들, 지역을 위해서 개인 사생활까지도 하지 못하고, 정말 얘 많이 쓰죠. 내가 옛날에 잘살기 운동 할 적이 한번 해봤다고. 새마을 운동을 했을 적에. 그래서 그 사람들 심정을 잘 알아요. 정말로 이 지역 젊은이들이 아니었다면 벌써 여기는 미군부대 자리로 들어갔을 거라고 나는 보고 있어. 그만큼 버텨주고 든든하게 해주었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서 여적까지 살 수 있는 거지. 애많이 쓰죠 그 사람들. 내가 날마돔 참석은 못해도 때론 미안할 때가 있어, 참석을 못허먼. 바람 불으먼 못 가요. 차편이 없으니까 자전거로다 댕기거든.
- 촛불집회 참석하실 때마다 느낌이나 생각은 어때요? 촛불집회 그렇게 매일매일 하는 거 처음이시죠?
처음이죠. 우리가 이걸 상상이나 할 수 있었나요 이거. 이렇게까장. 딴 데에서 시위하고 촛불시위하고 그러면 처음에는 어리석다고 생각했어. 근데 막상 이렇게 닥치니까 이해가 가요. 우리가 버텨야 사니까. 버텨야 사니까 어쩔 수 없다고.
- 촛불집회 나오시는 분들이 젊은 분들보다 어르신 같은 분들이 꼭꼭 나오시고 많은 것 같아요.
그러게, 고향의 애정을 져버릴 수가 없을 거에요. 나부텀도 고향을 떠난다는 건 상상도 못하는 거 아뇨. 그러니 그 사람들 심정이야 얼마나 괴롭겄어. 나랑 똑같을 거라고.
“우리는 칠월칠석날도 모를 심어봤어”
- 리민의 날은 어떻게 시작되었어요? 대대로 농사짓기 전에 대대적으로 모이고 그랬나요?
우리가 새마을운동을 할 적에, 그전에 도로포장하고 그랬잖아요. 나무가 없어서 가다 같은 걸 댈 수가 없으니까, 동네사람들이 순전히 땅을 파고, 전부 다 동네사람들이 나와가지고 작업을 하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동네에 모심기 전에 작업을 했거든. 하여간 딴 동네에서 안해는 것까정 세멘을 끌어다 했으니까. 그렇게 해고났는데, 농사짓기 전에 동네사람들하고 술이라도 한잔 먹어야겠다고 그랬어요. 홍창유씨라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이장보고 나 새마을지도자 볼 때 “그거 한번 하자.” 처음 시작을 한 것이 동네사람들이 단합도 되고 작업한 피로도 풀리게 해고 해기 위해서 핸 거지.
- 리민의 날에는 특별한 잔치는 없었나요?
동네사람들이 전부 나서서, 그때는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전부. 우리 부락 사람들이 천여 명이 넘었으니까 학교 운동회보다 더 컸지. 1회가 처음 그렇게 시작된 거여. 후대들이, 이장들이 이어받아가지고 여태까지 내려온 거지. 그게 단합의 한 목적이에요. 좋더라구. 지끔은 뭐 초등학생들이 줄고 뭐. 이 3개 부락, 도두2리, 내리 분들까지 초청해가지고 놀았으니까 굉장했지 뭐.
- 대추리라는 지명은 곡식이 많이 난다고 해서 대추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설명을 해요. 일제시대 때부터. 그때도 해답 빼놓고는 꽤 넓었지. 해답이 엄청 넓은 거거든. 여기는 야산이기 때문에 개간하면 얼마든지 밭으로 맨들 수 있고 그런 땅이었어 여기가.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하면 여기가 누가 살고 여기가 누가 살고 죄 기억이 나. 우리는 칠월칠석날도 모를 심어봤어. 6.25 때. 전쟁은 났는데, 피난 다 가고. 남은 사람들이. 비가 사나흘 꼬박 왔었어요. 그러니께 육답들, 그 높은 데 있는 거. 물이 없어서 못 심다가 물을 막어가지고…. 못늙은이랫 소리 들어봤어? 그게 바로 못늙은이여. 못자린 못자린데, 키만 큰 거야. 말르니까. 타들어가다가 말르니께 거기서 올라온 것이 꽃을 펴. 그런 걸 뽑아다 또 심는 거여. 칠월칠석날 심어봤어. 200평 한 마지기에 딱 한가마 나와.
- 그림은 저희가 가져갈게요.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비행장 확장문제 때문에 담배만 늘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