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다. 봄은 계절 주기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기다림’을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한탄조의 봄은, 봄은 봄이로되 봄이 오진 않은 것이다. 김유정의 『봄봄』이 그렇다. 김유정은 1935년 12월에 이 단편을 발표했다. 『봄봄』의 데릴사위는 점순이와의 혼인을 꿈꾸며 등골이 빠지도록 죽어라 머슴질을 한다. 물론 한번 욱해보지만 이 또한 여의치 않다. 가재는 게 편이다. 이 소설이 다루는 것은 무식하고 힘없는 놈 골려 먹기다. 골려 먹기의 또 다른 표현은 ‘뒤통수 치기’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뒤통수 맞는 것과 매일반이다. ‘문디 새끼 꼴 좋다’며 혀 한번 끌끌 차고 돌아서면 그만이겠으나 당하는 놈이 한둘이 아니면 눈깔 돌아가게 돼 있다.

김유정은 『봄봄』을 쓰기 전에 『금 따는 콩밭』과 『노다지』로 등단한다. 둘 다 ‘금’을 다룬 소설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시대정신을 부동산이 규정한다면, 당시 조선시대의 시대정신은 ‘금’이 규정했다고 할 수 있다. 1935년, 바야흐로 ‘황금광 시대’다. 김유정의 『금 따는 콩밭』과 『노다지』를 읽고 나서 『봄봄』을 읽으면 우리가 어떻게 뒤통수를 맞으며 살아왔나가 슬쩍 보인다. “1930년 초 한반도에 불어닥친 골드러시는…일본 군부의 산금정책의 결과물(『황금광 시대』, 전봉관 지음)”이었다. 당시 일본의 신용 경색 위기와 군비확충을 위한 국제통화로서의 금을 확보하고자 했던 열망이 1930년대 초 한반도에 황금광 열풍을 몰고 왔다.

당시 한반도에서 생산된 100톤이 넘는 금의 대부분은 일본으로 넘어갔다. 1934년 한 해만 해도 일본으로 건너간 금은 10톤에 이른다. 당시에 생산된 금은 전세계 금 생산량의 1/5, 당시 조선인은 자신도 모르게 제2차 세계대전의 확대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 당시에 금광으로 한 건 했던 이들 가운데 ‘방응모’ 같은 이는 ‘조선일보’와 함께 남았지만 대다수는 “콩밭”도 간수하지 못했고, 이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만주로 넘어갔다. 물론 금괴로 한탕 하겠다는 이들도 수시로 만주 땅을 밟았다. 만주로 밭을 갈러 간 이들도, 금의 시체차익을 노린 밀수업자도 풍족한 삶을 위한 어떤 기대를 품었을 것이다. ‘봄’이 가진 뜻 ‘기다림’은 무엇인가를 ‘기대’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앞날에 대한 새로운 기대, 다가올 세계에 대한 어떤 바람을 스티븐 툴민은 ‘기대 지평’이라고 했다. 1930년에 조선은 유례없는 풍년을 맞았지만 세계체제에 깊숙이 편입된 당시 조선은 전세계 농작물의 폭락에 따라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한다. 이때 등장한 것이 일본의 금본위제 복귀다. 이 때문에 농업중심의 지평이 투기중심의 지평으로 서서히 전환하다가 일본의 금본위제 정지에 따라 사람들의 지평은 금 투기로 완전히 돌아선다. 농업중심의 사회에서야 자족이 가능했지만 국제 산업체제에 편입된 당시 조선인으로서는 가치의 변화를 좇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생산하는 족족 빼앗기는 사회구조는 한탕에 대한 열망을 더해 그것이 설령 뒤통수 맞는 짓이라 해도 뛰어들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빼앗긴 들에서 봄을 기다리는 것은 허망한 일이다.

우리의 기대 지평이 가장 긍정적으로 진행된 사건은 다들 아는 1960년이었다. 4·19는 ‘미완의 혁명’이라고도 한다. 당시의 사람들은 어떤 기대를 하고 있었을까? 당시에 여전히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생소한 것이었다. 대신 한국전쟁을 거쳤지만 통일에 대한 희망이 있었을 것이다. 봄의 기대는 ‘희망’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허망한 기대, 오지 않을 희망은 주로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미 미·일·한 삼각안보체제에 속한 한국은 박정희의 등장과 국가이념으로서의 반공을 예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혁명 세력’ 박정희에게 또다시 뒤통수를 맞는다. 오늘날의 운동 가운데 이와 비슷하게 뒤통수 맞기 딱 좋은 구호는 집회현장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우리끼리’라는 구호이다.

‘우리끼리’ 뭘 해보겠다는 주장은 주사파에서만 볼 수 있는 주장은 아니다. 2001년에 완공된 인천 국제공항은 우리끼리 만든 ‘허브’ 공항이다. 부산항을 세계항으로 만들겠다는 우리끼리의 주장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안드로메다가 그리울 만한 삽질 ‘한반도 대운하’는 그야말로 우리끼리 삽질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전체의 90%가 농민이어서 어느 정도 자급자족이 가능했던 시대의 조선도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흐름을 한 발짝도 비켜가질 못했다. 휴전선으로 완벽하게 꽉 막힌 섬인 남한에서 삽질만 하다가는 힘없고 빽없는 놈들 등골만 작살날 뿐이다. 그리고 삽질이 끝나는 순간 공들여 쌓은 모래성이 무너지듯 비극은 시작된다. 《달콤한 인생》에서 이병헌이 말하듯 “이젠 돌이킬 수 없잖아요.”

지금의 한반도가 섬이라는 것은 4·19가 바랐던 기대 지평과는 다른 흐름을 가진다는 말이다. 이제 많은 사람이 통일을 지상과제로 주장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유통기한이 지난 것이다. 비록 주성치 대인이 ‘사랑에는 유통기한이 없다’고 말했지만 그건 주사파에게나 먹히는 얘기다. 일제시대와 그리 멀지 않은 1960년대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간단한 절차를 거쳐 대륙으로 들어갔던 이들이다. 지금 우리가 보는 시선의 폭과 그들이 보던 시선의 폭은 전혀 다른 것이다. 60년대가 대륙의 일부로서 하나의 민족을 토대로 구성된 세계 속의 한 체제를 꿈꾸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사면이 꽉 막힌 섬에 산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전 세대가 가진 환상의 베일을 걷어내야 한다.

영화 《라이방》의 주인공들은 한탕에 실패한 후 봄을 찾아 베트남으로 떠난다. 영화의 마지막에 그들이 시클로를 타고 보여주는 표정은 황금, 건설, 부동산 따위와는 하등 관계없는 밝음이다. 만물이 소생한다는 봄은 밝은 이미지로 대변된다. 그러나 또 다른 봄을 찾아온 이주노동자들을 한국정부는 야멸치게 내친다. 오늘날 한국에서 성장의 상징인 건설이 실은 소수의 희망인 것처럼, 동아시아 전체가 연결되는 삶은 소수를 위한 성장신화를 무너뜨리고 모두가 공생할 수단이지만 지금 당장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내친다. 볕이 드는 창문에 커튼을 내리 걸고 형광등을 켜는 우울한 짓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이판에 가려는 박중훈의 머리에 총알이 박히듯이 등짝이 부러 진지도 모른 체 기어만 다닌다. 그리고 우린 그걸 ‘게임의 법칙’이라 말한다.

봄이다. 한국의 데릴사위들은 결코 오지 않을 봄을 꿈꾼다. 여기서 데릴사위는 머슴과 동의어다. 그리고 머슴이 꿈꾸는 봄은 돈과 권력이다. 어느 시대에나 마찬가지지만 머슴은 머슴일 뿐 지주가 되지는 못한다. 가뭄에 콩 나기보다 더 어렵다. 현대판 지주들은 이를 아주 잘 알고 있으며, 너무도 손쉽게 이를 활용한다. 머슴들이 돈과 권력의 해바라기인 동안은 골려 먹히는 줄 알면서도 결국 따라올 거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머슴인 시대에, 모두가 눈깔 돌아간 시대에 붙잡을 거라곤 성장의 신화뿐이니 지주에게 반항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머슴들에게 삽을 겨눈다. 우리끼리란 그런 것이다. 실은 삽자루를 놓고, 따스한 볕을 즐기며, 이제 성장이니 나발이니 집어치우는 게 중요하지만 그러질 않는다. 그렇게 계절로서의 봄은 가고 사람들이 바라는 봄은 도착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