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일. 하늘이 어둡다. 어두운 정도가 아니라 그냥 검다. 그뿐 아니다. 천둥 또한 끊임없이 몰아친다. 혹시나 이마저 신적 계시로 받아들이는 이가 있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마저 든다. 요즘 사회가 그렇다. 많은 이들이 80년대로 돌아갔다면 혀를 찬다. 불안, 걱정, 초조. 무속에 기대려는 이들이 많을 걸 탓할 게 아니다. 앞날이 오늘처럼 깜깜하기만 한데 기댈 곳이 없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미래를 비관한다. 이는 오늘에 맞닿은 어제가 비관적이었기 때문이다. 어제는 80년대, 혹은 80년대까지다. 그리고 소수에겐 바로 어제 일이다.
1987년을 기점으로 사회가 바뀌었다. 운동으로 민주화를 이루었으니 확 바뀌었다고 말하지만, 기존 체제는 여전하고 여기서 제도화가 이루어졌다. 많은 부분이 바뀌었지만, 또 그만큼 바뀌지 않은 부분도 많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봉준호 감독 영화 〈마더〉에서 ‘도준’이 그렇다. 도준이 서른을 넘기지 않았다면 80년대 생이다. 그런데 도준은 엄마에게 죽을 뻔 한다. 고쳐 말하면 동반자살 시도다. 그때가 5살이니 대략 87년 전후로 추정할 수 있다. 엄마는 말한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사는 꼴은 매 일반이다.
극단적인 선택 이후로도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것 또한 비극이다. 물론 변화가 없지는 않다. 도준은 ‘바보’가 됐고, 엄마는 죄의식에 깊이 빠진 채 살아간다. 이는 정상적인 삶이 아니다. 도준이 비극인 건 바보가 됐다는 것만이 아니다. 그에게 기억은 단기적이다. 지압법을 이용해 기억을 떠올리지 않는 이상 그는 그때그때만을 살아간다. 그러니까 다섯 살 도준과 지금을 사는 도준 사이에 채워진 것이 없는 만큼 그 거리는 너무도 짧다. 그러므로 다섯 살 도준은 언제라도 지금으로 끌어올 수 있는 악몽이다.
그런데 그 기억을 떠올리는 방식이 폭력을 통해서이다. 감옥에서, 다른 수감자에게, 두들겨 맞고는 기억을 떠올린다. 마치 우리가 지나간 어제 촛불을 들고 광화문 네거리에서 두들겨 맞을 때 지난 80년대를, 지난 정치 사건들을 확 떠올리듯이 그렇게 떠올린다. 고통과 자극이 없다면 하루하루 그까이꺼 오늘도 대충 수습하며 살아가는 우리와 도준에게 차이란 별로 없다. 여기에 엄마가 있다. 우리를 낳은 존재다. 우리를 고이고이 키우긴 하나 사건이 없다면 행동도 없다. 게다가 또 다르게는 사회적 약자다.
영화 중반, 진구에게서 힌트를 얻은 엄마는 살인 현장으로 급히 달려간다. 여기서 카메라는 먼저 엄마에게 초점을 맞춘 다음 배경이 되는 낡은 주택가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카메라는 천천히 뒤로 빠지며 이 둘을 하나의 초점에 맞춘다. 여기서 엄마는 복합적인 인물이 된다. 앞만 보고 달려온 세대이자, 하위 계층을 상징하며, 맹목적인 인물이다. 게다가 결코 구조에 도전하지 않는다. 대신 고착된 구조를 보이는 데 만족한다. 이는 ‘엄마의 사랑은 끝이 없어라’식 액션 영화와 다른 지점이다.
영화는 크게 두 집단으로 나뉜다. 여기서 권력 구조에 속한 이들을 다루는 방식은 정말로 평이하다. 경찰은 사건이 생기면 범인을 잡는다. 먼저 잡고 권리는 나중에 말한다. 변호사는 의사, 검사와 공모한다. 아무개 공무원을 남편으로 둔 약재상 사장은 엄마를 괴롭힌다. 그러나 이 구조에 진입하지 못한 이들은 다르다. 영화에서 핵심적인 장치로 세 번 등장하는 고물상 주인을 제외하면 핵심인물 각각은 각자 복잡한 서사를 가지며, 착취 그룹인 남성과 피착취 그룹인 여성으로 또 한 번 세분화된다.
그렇다고 해서 피착취 그룹이 반격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비록 영화에서 모호하게 처리되긴 하나 듣기만 해도 뭔가가 울컥 치미는 별명인 ‘쌀떡 소녀 아정’은 보험 행위를 짐작게 하는 사진을 찍는다. 엄마는 아들이 결백함을 믿고, 상대적으로 악질인 진태를 뒤쫓는다. 물론 헛수고다. 또한, 영화는 이들 착취 그룹과 피착취 그룹이 얼마나 유기적으로 엮여 있는가를 보여준다. 유기적인 두 그룹에서 특히 진구는 엄마에게 있어 착취자인 동시에 조력자이며, 일반적인 인식을 대표하기도 한다.
영화에서 우리와 가장 가까운 것은 사실 진구뿐이다. 용의자를 잡아 족쳐서 심문하고는 이것이 바로 경찰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 진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찰학교에 갔어야 하는데” 이는 오늘날 우리가 가진 인식을 대표한다. 또한, 우리는 진구와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늘 착취하지만 동시에 늘 착취당한다. 잘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영화에서 살인현장을 검증하는 장면을 보자. 그곳에는 영화에 등장하는 주요인물이 대부분 모여 있다. 게다가 이주노동자도 보인다. 아정보다 약간 나은 위치를 차지하는 이들이다.
봉준호 감독은 이 세계를 정말로 비관적으로 그려낸다. 근거 없는 비관은 아니다. 영화가 시작하면 ‘마더’가 등장한다. 그리고는 춤을 춘다. 넓은 갈대밭을 배경으로 춤추는 마더는 고통스러울 때 얼굴을 가리고, 눈물이 날 것 같으면 몸을 돌려 얼굴을 숨긴다. 죄를 감추는 지극히 이성적인 행위다. 그리하여 영화가 진행되고 사건을 관통한 마더는 다시 갈대밭 그 자리로 돌아온다. 그러나 춤은 추지 않는다. 사건은 정확히 한 바퀴를 돌아 제자리로 돌아온 듯이 보일 뿐이다.
마더는 효도관광을 떠나려고 한다. 그때 도준은 물건 하나를 건넨다. 그것은 죄를 증명하는 것이다. 버스에 탄 마더는 안 좋은 기억을 잊게 한다는 자리에 침을 놓는다. 그리고 감정에 몸을 맡기는 엄마가 되어 춤춘다. 저 끔찍한 과거를 다시 망각으로 돌려보내는 것, 실은 늘 우리가 잊어 왔던 끔찍하지만 중요한 사건이 늘 그렇게 잊히는 것과 같다. 이렇듯 복작거리며 사건과 사건을 거치며 살아가는 이 사회가 실은 변한 게 별로 없다는 것이야말로 비관의 근거다.
2월 2nd, 2010 at 10:12 pm
늦게 쓰는건데요 엄마의 사랑에 주연였던 엄마가 봉준호 마더에 출연했다능…ㅎㅎㅎ
2월 3rd, 2010 at 4:15 pm
‘엄마의 사랑은 끝이 없어라’는 예전 키노에서 스틸 사진으로만 봤습니다.^^;;